스스로 포장하는 아이러니
지난 주말 산행 중 내가 고른 나무막대기는 오늘날의 체벌 도구가 되었다. 스스로 가져오라는 말에 심혈을 기울여 고르고 고른 어른 손바닥만 한 여린 나뭇가지는 “에이 고를 거면 제대로 골라야지(허허)” 한 마디로 단숨에 기각되었고, 아빠는 반듯이 세워놓으면 내 가슴까지 올만큼 커다란 나무몽둥이를 손수 주워 차 트렁크에 넣어 가지고왔다. 비교적 작은 여러 개를 챙겨 올 때도 있었지만, 크기에서 오는 중압감은 평소보다 큰 공포심을 주었는지. 길이가 길면 길수록 산행 중에는 지팡이로 쓰이는 그 몽둥이에 눈이 가는 횟수가 많아졌다.
집으로 모셔온 몽둥이는 자칭 ‘사랑의 매’라는 이름을 달고 항상 우리 집 소파 아래에 잠자고 있었다. 은둔의 고수가 칼집에서 명검을 꺼내듯 체벌을 결심한 아빠는 매번 소파 아래에 뉘어있는 사랑의 매를 꺼냈다. 하지만, 아빠의 엑스칼리버는 강도가 좋지 않아 몇 번 쓰고 나면 부러졌고, 모든 여벌을 쓰고 나면 또다시 나에게 선택권을 주곤 했다. 네가 맞을 걸 찾아오라고. 그럼 나는 당연한 수순으로 부엌으로 가 막대형태를 조금이라도 갖춘 가재도구들 중 하나를 선별해 왔다.
보통 나는 주황색 수세미가 달린 물병 청소솔을 골라왔다. 가져가 컨펌을 받을 때마다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듯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너의 노력이 가상하니 받아준다는 리액션을 하곤 했다.
또다시 선택의 시간. 몇 대를 맞을지 내 입으로 말한다. 사실 내가 왜 혼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이유를 상세하게 들은 적도 없으며, 앞으로도 고칠 생각은 딱히 없지만 일단 미안하다는 태도를 취하며 이 일련의 의식을 끝내야만 했다.
“... 5대”
적지도 많지도 않은 숫자를 말한다. 너무 적다고 혼나지도 않고 그 수가 크게 불어나지도 않을 수를.
이어 아빠가 고대해 오던 그 의식이 시작된다. 이름하야 ‘아버지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강인함으로 얼룩진 거룩한 행위. 마부가 채찍질하듯 어깨와 팔은 가로 130도로 꺾이며 최대한의 스냅을 이끌어낸다. 단 5번이라는 그 소중하고 작은 기회를 날려버릴 수 없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여 손목에 반동을 취해 내리친다. 한창 하고 나면 진이 빠질 정도이다. 체벌 후 몸과 마음이 스트레스에 절어 한 숨 푹 잘 정도니 말이다.
어찌나 세게 그리고 진심으로 때리는지 윽 다문 입술과 큰 가동범위에 흔들리는 살, 그리고 너무 힘을 쥔 탓에 일어나는 피부 경련이 피부 너머로 선명하게 보인다. 휘두를 때마다 높은음으로 나는 휘리릭 소리도. 나는 그의 모든 비언어적 행동과 모습들이 비단 훈육을 위해서만 존재했다고 보지 않는다. 그의 진심 어린 미간이 너무나도 여실히 보여주었다. 감히 태산과 같이 위대한 아버지인 나를 거역한 이 생명체를 처단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한편, 그 스윙은 꼭 공평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예쁨 받는 막내딸은 달랐다. 울고 불며 미안하다고 질질 짜는 셋째 딸은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 알까. 나는 모르는 걸 아는지 아니면 나에게 통하지 않는 체벌의 힘이 막내에게는 먹히고 있는 건지. 선택권이 주어질 때마다 바짓가랑이를 잡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막내를 보고 아빠는 금방 마음이 누그러졌다. 보는 이들의 눈살에 마지못해 든 사랑의 매는 예상했던 휘둘림 없이 다시 소파 아래로 들어갔다.
우는 이를 보며 이만큼 사죄했으면 됐다고 외치는 그를 보며 나는 환멸을 느꼈다.
그 모습을 보며, 일전에 TV를 보느라 누워있는 아빠의 옆을 지나가다 실수로 허벅지를 밟아 바닥에 내리 찍힌 내 꼴이 떠올랐다. ‘헉’하는 소리를 냄과 동시에 100킬로가 넘는 육중한 체구의 온 힘이 실린 손바닥은 내 몸을 지체 없이 가격했고, 그 힘을 온전히 전달받은 나는 두둥실 떠올랐다가 빠르게 바닥으로 추락했다. 내 나이 8살 무렵이었다. 몇 번을 연달아 치고 난 직후엔 예상된 시나리오대로 선택지가 이어졌다. 선택을 하지 않는 대가는 분명했다. 내가 울고불고하며 시간을 허비할 때면 이미 화에 후끈 달아오는 아빠는 나에게 주어진 조금의 자비인 선택지들마저 빼앗아갔다. 플라스틱 청소솔대신 밀대를 의기양양하게 가져오는 아빠와 마주하는 것이다.
부모는 과거 모든 것이 추억이고 그 시절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 말한다. 때로는 편집된 기억으로 아름다운 일상을 회상한다. 하지만 내가 겪은 드라마는 가족의 애환이 담긴 일일연속극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스릴러였다.
그 어린 나이에도 안다. 내가 지금 혈혈단신으로 나가면 더 이상 몸 뉘 일 곳이 없다는 것. 체벌에서 벗어날 수는 있어도 그 외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불리한 것 투성이라는 걸 말이다. 자연스레 아빠와 집은 내가 나가기 전에 붙어있기 위한 존재로 전락했고 벗어나고 싶은 불안한 곳이 되었다.
지금 당장 맨몸으로 내쫓기는 것보다, 작은 좌절들 속에 사는 삶을 택한 나는 적어도 이 시놉시스가 아름답지 않다. 거울을 보지 못해 아름답다 포장하는 그들의 민낯은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