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통의 하루 Jan 31. 2023

06_끌어내 달라 간청했나이까?

인간 실존에 대한 의문



조물주여, 제가 진흙에서 저를 빚어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간청했나이까?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절 끌어내 달라고?

- 존 밀턴 <실낙원> 중에서


이 구절에 강한 울림을 받은 나는 웃기게도 교회를 꽤 다녔다. 독실하신 권사님을 친할머니로 둔 덕이었다. 기어 다니거나 이제 막 걸어 다니는 아이들을 위한 영유아반에 다녔던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주말이면 아빠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로 갔다.


하지만, 아빠의 보여주기용 효심은 얼마가지 않았는데. 현실주의 성향이 짙은 탓인지 아빠는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  무렵부터는 간헐적으로나마 가던 교회에 전혀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간의 수고는, 그녀의 믿음 덕분에 명절에도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되는 아빠와 엄마가 베푼 최소한의 배려였던 것일까.


친할머니집에 방문하는 주말에는 어김없이 교회에 가야 했지만, 그게 아니라면 아빠가 자발적으로 주말을 반납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교회를 친구들과 놀 수 있는 또 하나의 공간쯤으로 여겼던 나는 중학생이 될 때까지 교회에 꾸준히 나갔다. 달란트와 문화상품권에 혹해 가기 싫은 날에도 억지로 몸을 움직였고, 주일은 오후부터가 온전한 내 시간이었다. 초등학교 방학에 맞춰 시작하는 여름성경학교에 참여할 때면 주일학교 선생님이 몰래 꺼내주는 육개장 사발면과 캠프파이어는 추억이 되었다.




그 기억들은 오래지 않아 추억으로만 남게되었다. 여름성경학교 한켠에서 진행된 어른들의 통성기도는 두려움을 주었고, 성경 구절에 대한 의문점은 나이가 들수록 커져만 갔다. 신은 본인이 점찍은 이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다른 이들을 하나의 장치로 사용하였다. 그 규모는 크기도 작기도 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이기도 했고 더 나아가 한 마을이 되기도 했다. 과거의 충직한 믿음은 기억되지 못하고 자비 없이 현재만 있었다.


나는 한결같을 자신이 없었다. 점 찍 힐만큼 특별하다 할 자신도 없었다. 더불어 믿음을 시험받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주변인을 희생하고 싶진 않았다. 한낱 어리석은 자로써 사랑하는 사람과 지금에 충실하게 살다가 가는 편이 나았다. 천국에 가던 지옥에 가던 상관없는 일이었다. 믿음 하나의 잣대로 사람을 분별하는 행태에 의심이 갔고 확고해져 갔다. 게다가 태어남과 동시에 졸지에 죄인이 된다니. 더욱이 이해가 어려웠다. 신이 부여했다고 하는 ‘인간’은 존재함 자체가 특별하기에 그 무게를 견디며 선함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팔려가는 망아지를 바라보는 어미소는 울부짖는다. 생존에 유리하도록 무리를 지으며 살아가기도 한다. 어떤 동물은 인간보다 더욱 빠르거나 패턴 기억에 능하기도 하다. 오늘날 우생학과 인종차별은 비판받으며 특정 종에 대한 우수함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공통의 주장을 하고 있다. 인간도 여느 동물과 같다. 그저 생명이기에 소중하고 나와 상호작용하고 있기에 가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기에 신으로 하여금 죄인이라던가, 내 자식이기에 부모에게 부채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의도가 어떻든 간에 옳지 않다고 본다.


누군가에 의해 탄생된 삶은 잉태를 강요하지 않았다. 사람을 빚도록 요구하지 않았고, 아이에게 마음주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낳으라 요청한 적 없다. 그렇기에 부모에 대한 사회의 치성에 취해 아이에게 생명을 제공한 만큼의 결과물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신자에게 행하는 위신과 같다는 것이다.


세간에서 말하듯 가난 속에서 자녀를 갖는 것이 죄악이란 게 아니다. 그 무엇보다 아이에게 행하는 부모의 마음과 행동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다. 자녀는 태어남으로 인해 가정 안에서 시험받고 핍박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 귀중한 존재여야 한다.


가정이란, 험난한 세상에 맞서기 위해 미리 대련하는 스파링이 아니라. 새로운 도약을 위해 굳은살을 만들어주는 줄넘기와 같은 곳이 되어야 한다. 사회의 규칙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익히도록 하되 밖으로 당당히 나가는 근육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하는 그 어린 시절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양육에 힘쓰느라 날려버린 젊은 세월을 자녀에게 보상받으려는 생각이 불쑥 들 때면 되뇌어야 한다. 그들이 원해서 이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라고.


작가의 이전글 05_어른 금쪽이는 AI가 피해 가는 걸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