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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준거'로 살 것인가 '외적 준거'로 살 것인가?

내적 준거형 인간으로 살 것인가, 외적 준거형 인간으로 살 것인가?!

2024년 갑진년(甲辰年) 새해 첫 글은

하루, 아니 한시가 다르게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해서 

근래 내 머리와 마음속 깊이 새겨지는 말들을 몇 자 적어 보고자 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글이기를 기대하기 이전에

새해 첫 마음잡이로 내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작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불과 48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지난해 나를 가장 가슴 아프게 만든 일은

배우 故이선균 사건이었다.


스토리텔링을 좋아해서 매일 영화나 드라마, 아니면 소설을 보면서

잠드는 것이 유일한 하루 마감의 소확행이기에,

그는 내 마음에 새겨진 좋은 배우였고, 그래서 단신 기사 제목으로 처음 접한

그 문구는 내 눈을 의심하게 했고, 내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어떤 연예인이 이런 말을 했었다.

자신들은 고압전선 아래서 고공외줄을 타는 무동과도 같다.

외줄을 타다가 떨어져도 위험하고, 너무 잘 탄다고 높이 점프하며 재주를 부리다가

고압전선에 닿으면 이 또한 위험하기에, 적정선에서 균형감을 잃지 않고

잘 버텨야 하는 운명을 그렇게 묘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비단 연예인만 그럴까, 모든 인생이 다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만 그 외줄 타는 모습을 모두에게 보이는 것과 아닌 것에는

분명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저런 표현이 그들에게는 와닿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살아감에 있어서 어떤 기준을 두게 된다.

의도하든 안 하든 그 기준은 사회적 규범, 관습, 법률 등으로

포장하여 불리기도 하지만, 정작 스스로는 그 기준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남들이 지키니까, 따라서하는 것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어릴 적은 부모의 교육,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의 교육,

그리고 사회에서는 주위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그래서 환경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가 나의 삶의 기준을 만드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이

우리는 성장 배경, 환경을 선택할 수 없다.

태어나보니 이런 부모, 저런 환경, 요런 내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독립하여

나만의 환경을 만들 수 있다.


이때부터가 바로 온전한 나의 정체성, 주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

독립은 곧 정체성, 주체성 형성의 출발점이자,

시작이 반이라고 이미 반을 이루는 중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정서적 독립'이다.


이때 독립은 반드시 경제적 독립을 전제로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미독립은 독립이라고 말할 수 없다.

즉, 누군가의 지배적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나의 먹고사는 문제를 쥐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의 청탁 혹은 명령을 내가 쉽게 거부할 수 없지 않겠는가?

자신의 정체성,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제적 독립은

필수조건이다.


그럼, '정서적 독립'을 위한 '정체성'과 '주체성'은 무엇인가?


정체성은 다시 개인적 정체성과 사회적 정체성으로 나눌 수 있다.


개인적 정체성은 성격, 가치관, 신념, 가치, 목표, 욕구 등을 포함하며,

사회적 정체성은 내가 속한 사회 집단에 대한 이해를 포함한 것으로,

인종, 민족, 성별, 종교, 직업, 계급, 지위 등으로 표현된다.

주체성은 쉽게 한 마디로 자신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의미한다.
내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능력이다.


자 그렇다면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수많은 선택의 기준,

내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하기 위한 판단의 근거,

준거(기준이 되는 근거)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가

최종 물음으로 남게 된다.


일례로, 내가 어떤 회사(조직)에서 특정 임무를 맡고 있다면,

그 임무에 주어진 수많은 선택과 판단에 있어서 

전임자, 혹은 선배들의 사례를 고려해서 따르면 쉽다.

하지만 삶이 늘 그렇듯 그 사례와 매번 일치하는 일이

발생하지만은 않는다.

종국에는 새로운 사례와 마주하게 되고, 이에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하는 책무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를 위해 준비된 조직은 프로토콜, 매뉴얼, 규정 등을 마련해서

우왕좌왕하지 않고 신속하게 이를 준거로 진행토록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준거에 따른 행동에 설령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그 책임은 최소화될 수 있기에 누구나 이런 규칙을 따르려고 한다.

그래서 준거의 유무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조직이 아니라 개인으로 좁혀지면 어떻게 될까?

바로 내 삶의 기준에 대한 물음이 된다.


내 삶의 기준에 정체성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앞서 설시한 대로 그 정체성이 개인적이건 사회적이건 

스스로 객관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기술해 보고,

내가 정해야 한다.

그것을 하나의 키워드로 표현하자면,
'가치관'이 될 것이다.

어디에 가치를 두는지 여부가 결국 내 삶의 정체성, 주체성 

향방을 결정하게 된다.


여기서 내적준거형 인간으로 살지,
외적준거형 인간으로 살지 결정해야 한다.

내적준거형 인간은 내면의 가치, 신념으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외적준거형 인간은 타인의 평가나 기대를 바탕으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예를 들면, 

내적준거형 인간은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라고 선물을 주고받지 않는다.

타인이 만든 기념일 따위에는 큰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사랑하는 누군가가 그것에 가치를 둔다면 그것에 따를지 여부만을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외적준거형 인간은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에 가치를 둔다.

그날 선물을 주거나 받지 못하면 실망하고 우울해하며 힘들어한다.

남들이 주고받는 날이라고 정한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나의 행복이 결정된다.


이렇게 보면 내적준거형 인간이 훨씬 성숙한 인간처럼 보이지만,

늘 그렇지만은 않다. 굳이 학교에 다닐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서

자신의 자녀를 아예 초등학교부터 보내지 않는다면 이건 자신의

내적준거로 자녀를 외적준거에 배치되게 교육의 기회를 막는 것이 되므로
법적처벌 대상이다.


다시 말해서,

외적준거로써 최소한의 사회적 법률적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며 살아가는 것이
균형 있는 삶의 내적준거형 인간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칫하면 우리는 내적준거 없이 외적준거로만 살아가게 된다.


외적준거에 대한 부분은 직접적으로는 부모나 가족 혹은 스승, 선배, 친구, 상사에게서,

간접적으로는 수많은 매체를 통해서 접하게 된다.

그리고 마치 그것들이 올바른 기준인양 저마다 이래라저래라 떠들어대니

별도 내적준거 없이 의식적으로 자각하여 주체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그들의 기준인 외적준거로써만 내 삶을 살아가기가 쉽다.


이런 경우, 자신들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내 모습을 보고 칭찬도 해주기에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그대로 살아가게 된다.


예를 들어, 범죄단체에서 칭찬받는 행동과 교도소에서 칭찬받는 행동이 같을 수 없다.

아마도 정반대의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어떤 부모는 공부 못하는 친구를 도와주고 친하게 지내는 것에 칭찬을 해주는 반면,

또 다른 부모는 그런 친구는 멀리하라고 가르치는 부모가 있다.

두 부모 심정 모두 이해는 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주체는 결국 나이기에 

그 선택과 판단의 몫은 오롯이 나의 결정이고 책임이다.


우리 뇌는 에너지 소모가 가장 많은 신체부위 중에 하나이며, 그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시키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 역시 우리 신체이기에, 최대한 머리 쓰지 않고

판단하는 것을 선호하는 인간은 누군가의 조언으로 대신 판단하고 행동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몰랐다고 무죄가 되지 않듯이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수용한 책임은

온전히 자신이 져야 한다.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 것과 같다.


수많은 사례에서도 나오듯이 자신의 내적준거 없이 신뢰관계로만

단정 지어 실행하다가는 큰 낭패를 보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요즘 매체에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는 '가스라이팅' 사기범죄도 타인의 기준으로

내 삶을 살아가기에 발생하는 문제다. 내적준거형 인간에게는 잘 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내적준거형 인간으로 살아가려면 용기도 필요하다.

내가 그렇게 믿고 그것이 사회에 악영향을 주지 않으면 괜찮으리라 생각하지만,

막상 관습대로 관성에 젖어서 살아온 이들에게는

자신과 다른 생각과 언행을 보이는 사람에게 관대하지 않을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비난과 조롱을 이겨내야 할 수도 있다.

그것이 옳고 그른 것은 훗날 역사가 판단할 뿐이다.

과거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 늙은 부모를 깊은 산속에 버리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악습을 넘어 폐습이다.

그러나 그 당시 서민들에게는 당장의 자신과 자녀들의 생계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풍습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때는 옳다고 한 행동이 지금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행동이다.

풍습이고 관습이라고 다 따를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하는 행위 중에 억지로 관성에 젖어서 해야만 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 무엇이 '고려장'같은 악습, 폐습일 수 있음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관습뿐만이 아니다. 지식도 마찬가지다.

수백 년 전 지동설을 깨달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도 당시 진리라고 믿었던

천동설에 반하는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사회에서 온갖 비난과 조롱, 심지어

죽음에 직면하기까지 했다.

이들의 내적준거는 당시 사회적 외적준거를 넘어선 것이었다.

용기 이상의 믿음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은 정반대로 천동설이 그렇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천동설을 믿는 이들이 있음, 아래 링크 참조)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5765

내적준거형 인간은 누군가의 말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스스로 깨달음이 있어야만 움직인다.


우리는 이런 자각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윗 세대가 살아온 기준대로 살다가는 굶어 죽기 십상이다.

세상이 변하고 그에 따른 룰(Rule)도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정치인들, 인문학자들 사이에서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과 배움의 열정이 상승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 그 이유가 있지 않나 사료된다.


내적준거형 인간이 되려면 내적 기준에 맞는 근거를 마련해야 하는데,

과학은 자연의 섭리를 알아내는 과정이기에,

여기서 얻어진 배움의 깨달음만큼이나 강한 근거가 또 있을 수 있겠는가?!


때문에 스스로 가치관을 형성함에 있어서 

어떤 누구의 말에도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깨달음의 가치로만 내적준거를 만들기에

'과학'은 가장 최적화된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과학은 그래서 단순히 어떤 현상을 파악하는 도구가 아닌
삶의 가치관 형성에도 매우 중요한 학문이다.
출처 https://kr.freepik.com 

여러분의 삶에도 

'Oh My God'이 아니라 'Oh My Science'가 선행되기를 바란다.


작금의 세상은 배움을 위한 스승(선생님)이 필요조건이 아니게 되었다.

모든 지식, 정보, 재료가 인터넷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그럼 누군가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스승에게 지식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도(道)와 예(禮)도 배우게 된다.

도와 예라고 인터넷에 없겠는가?!

이 세상에 없는 것도 있는 곳이 인터넷임을 우리는 잘 알기에 

저런 나이브(naive)한 얘기는 이제 귓등으로도 들을 사람이 없다.

또한, 내 여러 글에서도 거듭 언급했지만 스승이 공부한 것들이

현재는 불용한 지식이 되는 세상이기에, 

어제 배운 이론이 오늘의 이론에서는 무용한 세상이 되었다.

그만큼 빠르게 변하고, 발전하고, 생성되는 시대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그런데 이런 세상이 역설적이게도
나의 정체성을 찾고, 주체성의 능력을 키우는 데 있어서는
의지만 있다면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서기가 가능한 세상이기도 하다.

그러니 막연한 불안감에 누군가에게 함부로 의지하거나

소속되기를 바라기보다는 스스로 내 삶을 개척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위해 '문명의 이기'를 최대한 이용해 보기를 권한다.

여기서 문명의 이기란, 배움을 위한 모든 도구를 일컫는다.

대표적인 것으로 인터넷, AI, 그리고 책 그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다.

알아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기에
배움은 끝이 없고
그 배움에 이제는 가르침이 필요 없는 세상이기에 더욱더
이 배움이 절실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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