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쾌락 vs (과정을 통한) 성취감 and 행복
우리는 늘 행복해하고자 노력한다.
행복이란, 한 철학자가 말하길 기쁨의 상태를 일컫는 것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대 포장하여, 마치 이 상태가 계속 지속되어야 인간 스스로 어떤 정점의 결과를 얻은 것처럼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시대적 언어로 왜곡 변화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한다.
행복의 상태가 지속되면, 조증이지 제정신이 아닌 상태일 것이다.
사랑도 그렇다고 하지 않는가!
두근거림은 한시적이라고... 평생 지속된다면 심장병이라는 우스개 소리 말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끝은 어딜까? 계속 그 임계점을 높일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고대 철학에서는 행복이라는 단어 이전에 쾌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쾌락이라는 단어의 현시대적 어감은 다소 퇴폐적일 수 있으나, 사전적 의미는 행복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자칫 쾌락주의가 퇴폐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도 있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몇 백 년 뒤에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더 퇴폐적 의미로 치부될 수 있음을 난 지적하고 싶다.
*퇴폐: 쇠퇴하여 결딴이 남.
*쾌락: 유쾌하고 즐거움. 또는 그런 느낌. 감성의 만족.
*행복: 복된 좋은 운수,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우선 철학에서 이상적 쾌락은 아무런 걱정과 고민이 없는 평온한 상태 그대로를 말하기도 한다.
잃을 것이 있으면 지키기 위해서 걱정하고 고민한다. 그래서 무소유라는 말이 나온 것일 수 있다.
현재 우리는 행복하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행복에 이르기 위한 과정에 대해서 고민하기보다는 행복해지기 위한 수단과 방법과 도구에 대한 고민을 한다. 빠른 결과에 모든 초점을 맞춘다.
우리가 A라는 장소에서 B라는 장소로 이동할 때 빨리 도착함에 모든 가치를 둔다면, 편리하고 빠른 이동 수단을 찾는다. B라는 장소에 가서 뭔가를 해야 함에 목적이 있다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B라는 장소에 가는 과정에서 얻는 부수적인 이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유일하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시간이다.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돈으로 시간을 절약할 수는 있다. 그 절약된 시간에 무언가를 해야 할 목적이 있다면 이는 가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냥 절약한 시간을 헛되이 사용한다면, 돈으로 누군가의 소중한 시간을 내가 헛되이 써버리는 것과 같다.
빨리 뭔가를 이루는 것도 좋지만, 빨리 이루는 그 시간도 결국 많든 적든 시간이다. 효율적인 시간이란 도구와 수단으로만 사용되기보단 과정의 의미를 두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이다.
하물며, 우리가 종국에 추구하는 행복에 빨리 도달하면 무엇을 또 할 것이 있는가?!
그냥 행복은 상태이자 끝이다. 행복한 상태에서 그 이상의 더한 행복을 추구하겠는가?!
결국 과정에서 오는 성취감이 그 행복의 상태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 배부르기 위해서 먹는다면, 맛있는 것을 먹기보다는 빨리 배부른 것을 먹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과 맥락이 닿아있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 수단과 방법으로 과정의 성취감을 져버리고, 쉽고 편리하고 빠른 방법만을 생각하지 않나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쉽고 편리하고 빠른 방법의 도구는 돈이다.
돈만 있으면 우리는 쉽게 얻고자 하는 것을 취할 수 있다. 물질만능주의라 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 돈은 나에게 줄 수 있는 행복으로 가는 길에서...
부수적 이점(collateral advantage)을 놓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최근 갑질 논란 중심에 있는 대기업 일가 사례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들은 반세기 이상 엄청난 사회적 지위와 부를 축적하고 누려왔다.
그러다 요 몇 년 사이에 재벌 2~3세에 의해 그들의 삶의 실체가 드러났다.
왜 그들은 엄청난 부를 도구로 행복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굳이 회사에 출근해서 힘들게 일을 하며,
그 과정에서 화를 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 10분 1 아니 100분의 1000분의 1만 있어도 일하지 않고, 놀고먹으면서 여행하면서 살리라 생각한다. 오죽하면,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고 불로소득에 모든 행복한 삶의 방점을 찍겠는가?! 그들의 삶이 그만큼 피폐하고 지쳐있음을 방증한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 문제의 재벌일가의 사태로 돌아가서 그들이 이 지경에 이른 과정을 유추해보자!
이들도 처음에는 노력해서 부를 축적하고 그 축적한 부를 통해 행복을 누리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이 다음 세대에까지 오래 지속되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는 노력해서 얻는 과정이 없었기에 행복의 결과가 오래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어떤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사서 봐야 한다. 그 책을 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큰돈은 아니나 작은 돈이라도 없으면 우리는 그 책을 사지 못하고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돈이 많다면 굳이 내가 책을 사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읽고 그 정보를 얻을 필요 없이 그 책을 이미 본 사람을 고용해서 정보를 빨리 취하면 된다. 더 나아가 그 저자를 고용할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정보를 얻을 필요 없이 정보를 통해 하려고 하던 일을 시키면 된다.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면 모든 과정을 건너뛰어 결과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빠른 결과를 얻는다는 것 외에 그 과정에서 얻는 지식, 경험 등의 부수적인 이점들은 모두 잃게 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좀 더 비약하자면 태어나자마자 죽는 것과 다름이 없다.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좀 진부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으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최고라 말하지만, 살기 위해 돈이 필요한 것이지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돈이 최고라는 생각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얼마나 부질없는 사고 구조인지 알 수 있다.
재벌 2~3세 이들은 자신들이 노력해서 얻은 부가 아닌 할아버지가 이룬 부를 아버지 그리고 자신들의 세대까지 이어왔다. 태어나보니 돈이 많은 것이다. 남들에 비해 엄청 편리하고 빠른 결과를 늘 취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자판기처럼 인생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냥 돈을 넣으면 뭐든지 빨리 결과를 얻는 것이 삶의 스키마(논리구조/사고체계)가 되었고, 이에 충족되지 않으면 화를 냈다.
행복은 그들에게 자판기에 돈을 넣으면 빨리 원하는 것을 내뱉어내는 그 순간 찰나의 쾌락에서만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몇십 년 해보니 더 이상 행복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러다 이들은 과정에서 성취감을 맛보게 된다. 어떤 과정일까? 자판기에 돈을 넣고 더디게 원하는 것을 뱉어낼라치면 발로 자판기를 차는 것에 성취감을 맛본 것이다. 마치 때리는 순간 이 자판기가 좀 더 빨리 내뱉는다라는 것을 학습하고 그것이 자신의 노력이자 성취감, 행복을 주는 과정이라 여긴 것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자판기가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갑질의 대상이자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람을 도구로 생각한 것이다.
이들을 정신병자로 우리 사회는 취급하지만,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괴물이고, 누구나 그 상황에 처하면 될 수도 있는 시스템 프로세스가 문제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재벌들 사이에서 불거진 유사 갑질 사례들이 점차 나오는 것을 보면, 특정인의 사람 됨됨이나 잘못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질만능주의, 천박한 자본주의, 사람을 자판기로 만드는 세상!
이것이 마치 행복의 지름길인 양 잘못된 가치판단의 결과로 탄생한 이데올로기다.
결코 사람을 도구로, 목적의 결과만을 위한 마치 자판기의 동전처럼 취급해서는 안된다. 나만의 행복이 아닌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 노력할 때
비로소 나의 행복도 지속될 것이다.
더불어 물리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도
결과는 과정의 시간보다 선행될 수 없다.
이것은 진리다.
또한, 과정의 노력과 결과의 만족은 비례하고 그 지속시간 역시 비례한다.
이 또한 진리라 생각한다.
성공한 결과를 통해 타인이 나를 부러워하고 혹은 우러러보고, 이에 나는 우쭐되고 만족해하며, 행복해질 수 있다고 우리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지속될까?!
사회생활할 때 승진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성취감을 맛보고, 어느 정점에 오르면, 퇴직한다.
더 이상 나를 사회에서 쓸모없이 취급하는 것 같아 퇴직자들은 슬퍼한다.
쓸모없어진 나의 모습은 남이 나를 그렇게 본다라고 생각하는 자신이 문제다.
스스로가 주도적으로 삶의 주체가 되어서 타인의 의해 내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심외경'이라는 말을 가슴에 새길 필요가 있다.
내심외경이란, 나의 마음으로 바깥세상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시쳇말로 뭐 눈에 뭐 밖에 안 보인다라는 말로 쉽게 이해할 수 도 있으나,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마음이 바로서야 세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멈추고 고착되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성찰하고 소양을 쌓아야 성장할 수 있고, 그 성장을 통해 변화하는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 즉,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평가하지 말고 나 스스로 타인이 되어 나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성장과도 맞닿아 있다. 10대는 10대 만의 시선과 관점이 있다. 20대는 20대... 30대는 30대... 그래서 유교에서는 약관, 불혹, 지천명, 이순 말이 있듯이 그 나이에 맞는 지식적 정서적 성장이 필요한 것이다.
여담이지만 우리 사회는 취업 전까지 모든 지식을 쌓기를 바란다. 그것으로 취직해서 돈을 벌고,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20세기에는 가능했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21세기 4차 산업혁명의 현시대적 상황에서 그런 자세로 살다가는 도태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미 죽을 만큼 노력한 그들에게 다시 또 공부하라는 말은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의 끝이 다시 공부라는 말과도 같게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다음 그다음을 생각하고 결국 죽음의 이르는 자살을 택하는 청년들이 많아지는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돈이 목적이고 가치이고 결과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돈은 행복의 필요조건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이는 여러 지표를 통해서 이미 수도 없이 많이 밝혀진 내용이다.
그러나 필요한 만큼의 돈이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복지정책에 대한 요구와 갈망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정치지형의 엄청난 급변을 가져올 어젠다로 대두되는 것이다.
돈이 많은 자가 취하는 행복은 자칫 찰나의 쾌락으로 갈 수 있다.
사회가 그렇게 만든다.
돈만 주면 속된 말로 해선 안될 짓까지 하기 때문에, 이 돈의 효능감에 마력에 빠지면,
술, 담배, 도박, 마약과 같이 중독될 수 있다.
그것에 중독되면, 더 빨리 더 강한 자극, 쾌락을 좇게 된다.
그것이 삶의 정점에서 우리가 누릴 행복인가?!
살기 위해서 밥을 먹다가, 먹고살만하니 맛으로 식사를 하고, 더 살만하니 살을 빼기 위해서 먹는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모순적인 삶인가?!
정신 바짝 차리고 살지 않으면, 우리는 돈의 횡포에 놀아나다 삶을 마감할 수 있다.
일례로, 예전에는 조그마한 냉장고에 열 식구가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두 식구 사는데도, 냉장고 커다란 게 몇 개씩이다.
왜 그런가?? 조금만 생각해보라!
타인의 시선으로 내 삶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광고에서 큰 냉장고, 목적별 냉장고가 있어야만 행복한 삶인 양 호도하기 때문이다.
일반 냉장고, 김치냉장고, 별도 냉동고, 와인냉장고, 화장품 냉장고까지...
있으면 행복할 것처럼 보여주니, 초두효과, 선행학습에 의한 각인효과로 우린 세뇌된다.
그러나 주체적 삶의 가치로 세상을 바라보면 이게 나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병 주고 약 준다는 말이 있다. 지금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우리 사회는 마치 그것이 행복의 사이클인 양 많은 메시지를 던진다.
광고가 그렇고, 미디어, 콘텐츠, 예능 오락, 그리고 심지어 예술에서 조차도 그게 멋진 것처럼 호도한다.
홀로 태어나는 찰나(탄생)와 홀로 가는 것의 찰나(죽음) 사이에 긴 삶이 있는 것처럼,
시작과 끝의 가치를 두지 말고, 그 과정의 삶에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이다.
편리함에 속아 불편함에서 오는 부수적인 수많은 행복의 가치를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럼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이 수천 년간 성장해온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올바른 철학의 궁극적 질문이다.
이제 행복해질 시작점에 다시 우리는 서 있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 가장 행복한 것처럼 말이다.
-끝-
<사진, 글, 모두 Jack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