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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 선을 못 넘어가겠어'' 이제 여기서 끝내야 해' ' 하루면 모든 걸 정리할 수 있어' 이런 극적인 표현은 딸이 IB 2년 과정 중 1년을 마치던 무렵에 줄곧 하던 아우성이었다.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과정은 국제학교 교육과정으로 한국으로 치면 고등학교 2, 3학년에 해당하는 2년 과정이다. 언어 두 과목과 수학을 필수로 하고, 인문사회, 과학, 예술계열 중에서 3과목을 선택해서 공부하고, CAS(creative, artistic, service) 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Tok(Theory of Knowledge) 과목을 필수로 한다. 총 6과목을 공부하는 셈이고, CAS는 주로 동아리 활동과 봉사활동을 통해서 이뤄진다. TOK는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마지막에 발표와 에세이 쓰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10학년 말에 과목을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IB 과정에 대한 고민은 시작되는데, 아이들과 부모는 과목 선택을 위해 앞으로의 진로와 연관성, 시험 점수가 잘 나오는지, 어려운 과목인지 등을 따져본다. 심지어 어떤 과목은 조사연구를 위해 일주일 동안 트립을 가기도 하는데 다른 공부에 지장을 주지 않을지도 고려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아이들의 흥미와 대학 진학할 때 전공이다.
학교 선배 엄마들이 한결같이 하던 말이 IB과목 선택은 아이들이 스스로 하게끔 하라는 것이었다. 1년을 지나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자기가 스스로 선택한 과목이 아니면 힘든 과정을 뚫고 지나가기 어렵다. IB과정은 수업 내에서나 과제에서나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주도적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하기 어렵다. 수업시간에 토론하고 자기기만의 아이디어로 에세이를 쓰는 과정이 줄곧 있기 때문이다. 관심 있어서 공부하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가 크게 나는 게 IB과정인 듯하다.
그리고 대학 진학 시에 IB과정을 밟은 학생들에게는 특정학과마다 지원조건으로 필수 과목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특정 과목을 배우지 않았으면 지원하는 과에 제한이 생긴다. 예를 들어 엔지니어링 쪽 학과를 지원하려면 대학들은 고등학교에서 물리 과목 이수를 요구한다. 우리 딸도 과목 선택에 있어서 고민을 많이 했으나 결국은 자기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과목을 골랐다. 그리고 정말 애써도 10학년 때 점수가 잘 안 나왔던 과목은 적성이 그쪽이 아닌 것 같아서 배제시켰다. 딸아이는 자기가 선택한 과목에 대한 책임감 때문인지 아님 정말 흥미를 느끼는지 자신의 선택한 과목에 대한 만족감이 아직까지 높다.
11학년(IB과정 1년) 말이 되면 각 과목별 에세이 준비를 한다. 스스로 주제를 정해서 조사를 하거나 실험을 해서 일종의 보고서 같은 걸 쓰는데 12학년 때까지 이어진다. 과목별로 있기 때문에 11학년 말부터 준비해두어야 12학년이 돼서 과부하가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EE(extended essay)라고 4000자 에세이를 필수로 써야 한다. 한국 고등학교에서 말하는 소논문에 해당되는 것이다. 과목별 에세이건 EE건 에세이들은 모두 자기 아이디어로 주제를 정하고 조사,실험, 연구하여 써내야 하기 때문에 주제를 정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IB과정을 밟는 아이들은 한국 고등학생들 만큼 자기들도 힘들게 공부하고 있다고 토로한다. 딸애도 "엄마가 IB를 알아?"라고 하며 어렵고 힘든 과정이라고 투덜댄다. 아마 짐작컨대 힘든 건 에세이를 쓰는 것과 서술형 시험에 있는 듯하다. 그리고 하이레벨(high level)로 선택한 과목들은 대학 1, 2학년 과정 일부를 배우기 때문에 힘든 점도 있다고 한다.(배우는 과목들이 스탠더드 레벨과 하이 레벨로 나뉘는데 6과목 중 3과목은 하이 레벨이다) IB과정을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으니 힘든 정도를 따져보기 어려우나, IB과정을 졸업한 학생들이 하는 말이 대학 가서 공부가 좀 수월하다고 한다.
딸아이는 과학 두 과목을 하이 레벨로 듣는데, 11학년 때는 매주 실험을 하고 보고서를 쓴다고 한다. 실험도 모든 아이들이 같은 실험을 하는 게 아니라 각자 자기 아이디어를 내어 실험을 한다. 각자 자기만의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 서술형 시험 또한 지식을 단편적으로 암기해서는 안되고 지식과 자신의 생각을 줄로 꿰어서 논리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독창적이면서 논리적이어야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내가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보고서를 쓰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던 기억이 난다. 어디서부터 글을 써야 하지? 더 이상 쓸 말이 없는데 어떻게 분량을 채우지.... 이렇게 표현해보고 저렇게도 표현하면서 분량 늘리기 작업을 하고..... 머리가 쥐가 나던 경험이 있다. 자기 것을 만들어 내는 과정은 머리를 쥐어짜는 느낌, 머리의 톱니바퀴가 정지한 것 같은 상태를 수차례 경험하게 된다. IB과정을 밟는 아이들은 줄곧 뭔가를 써대면서 생각을 넓히고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단순 암기식 교육과정보다는 아이들의 지식과 사고가 깊어지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과목별 제출해야 할 과제들이 있고, 중간중간에 시험이 있으면 아이들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정신이 없으며, 매우 예민해진다. 엄마들이 만나면 하는 말이 벌컥 화를 내는 애들 때문에 할 말도 못 꺼낸다고 한다. 우리 딸내미도 다를바 없다. 할 것이 많고 다른 생각할 여유도 없는데 엄마가 뭔가를 묻거나 하면 몹시 피곤해하며 짜증을 내기 일 수다. 때때로 퀭한 눈에 다른데 정신을 둘 여유가 없어 보이는 모습은 흡사 경계의 혹은 보호의 막을 두르고 다니는 듯하다. 그래서 그냥 맛있는 밥을 지어주고 지켜보는 게 엄마로서 하는 일의 전부인 듯싶다. 물론 요리에 흥미가 없는 엄마로서 줄 곧 맛난 것을 기대하는 딸아이의 욕구에 부응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딸이 IB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IB를 먼저 거친 학교 선배 엄마들과 경험담을 나눈 적이 있었다. 선배 엄마 중 한 분은 엄마로서 해준 게 맥주 사다가 같이 먹은 것뿐이 없다고 했다. 아이가 방에서 나오질 않아서 잠시 쉬라는 차원에서 맥주 먹으러 방 밖으로 불러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딸도 그렇다. 방에서 노트북 앞에 앉아서 화장실 갈 때 외에는 방을 잘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방에서 노트북으로 유튜브 동영상을 보거나 핸드폰 게임을 할 때도 있으나 학교 공부며 숙제가 많다는 걸 아니 학교 공부를 하고 있으리라 믿을 수밖에 없다.
딸아이는 금요일 학교가 끝나면 언제나 놀거리를 찾았다.(이것도 11학년 때 갖는 여유이다. 12학년인 지금은 또 다르다. 12학년 때의 딸애 상황은 다음에 쓰기로 하자) 영화를 볼까? 맛있는 걸 먹으러 갈까? 보타닉 가든에 놀러 갈까? 딱히 흥미를 끄는 놀거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불금을 어떻게든 즐기려고 애쓴다. 딸아이가 재충전할 수 있도록 딸아이의 욕구를 허용해 주어야 한다고 느끼지만, 엄마로서 수험생 아이가 놀고 있을 때 갖는 불안감은 감출 수가 없다. 그래서 늘 사족이 붙는다. "영화 보고 나서 (공부)할 거 있음 해. 계속 놀지 말고...."
딸아이가 자기 방문 앞에 바닥 무늬선을 보며 '이 선을 못 넘어가겠다' 이 말인즉슨 학교에 못 가겠다는 말이다. ' 이제 여기서 끝내야 해' ' 하루면 모든 걸 정리할 수 있어'라는 말들도 모두 학교를 빨리 끝내고 싶다는 말이다. IB 첫해를 끝낼 무렵 11학년이 무사히 지나갔다는 안도감과 함께 다가올 12학년 과정에 대한 두려움이 굴뚝같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