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원산책 Aug 18. 2022

비눗방울에 담은 마음

1989년 2월, 매우 정정하시던 아빠가 갑작스레 위독해지셨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시고 누워 계셨다. 정말 어리둥절했다. 그러다가 병원에 실려가셨고 엄마는 병원에서 계속 아빠 옆을 지키고 계셨다. 나는 여덟 살이었고 내 위로 세 명의 언니들은 각각 스물하나, 열아홉, 열여섯 살이었다. 우리는 집에서 초조하게 엄마의 전화를 기다렸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큰 언니가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끊은 언니는 “아빠가 돌아가셨대.” 하고 말했다. 간암이라고 했다. 언니들은 울었다.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언니들 옆에서, 무릎을 세워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그 갑작스러운 상황을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엔 너무 어렸던 것 같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처음 맞은 순간, 어린 내가 느낀 감정은 슬픔이라기보단 얼떨떨함과 당혹감, 두려움이 뒤섞인 어떤 것이었다.


아빠의 장례식 날은 몇 장면의 이미지로만 남아있다. 아주 흐리고, 부슬비가 내리는 날씨였다. 엄마와 큰언니는 상복을 입고 머리에 흰 리본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빠를 이제 못 보는구나’ 하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의 팔을 잡고 땅속에 내려진 관위로 한 삽의 흙을 뿌렸던 기억이 있다. 그때 뿌려지던 흙을 바라보는 게 아주 낯설고 이상하고 무서웠다.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깊이 느낀 건 시간이 더 많이 흐르고 난 후였다. 엄마는 밤에 딸들 몰래 숨죽여 울곤 했다. 어린 나도 엄마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들었다. 난 엄마를 웃겨주려고 괜히 실없이 엉덩이춤을 추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도 했다. 아빠가 집에 없는 삶이 조금씩 실감이 나면서 슬슬 슬픔의 감정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정환경조사서를 내는 게 싫었고, 이후 몇 년간은 친한 친구에게도 아빠의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울지 않고 담담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아마도 든든한 내 편인 한 사람이 없어졌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후 초중고 학창 시절을 거쳐, 대학 입학과 졸업, 취업, 결혼, 출산 등 삶의 변곡점들을 지날 때마다 아빠가 생각나고 그리웠다. ‘이런 순간들을 아빠와 공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아빠가 살아계실 때엔 내가 너무 어려서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우면서부터는, ‘자식으로서 내가 아빠를 그리워한 것보다 하늘에 계신 아빠가 나를 그리워하는 감정이 훨씬 더 깊고 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리적으로 만날 수는 없지만 이제 아빠의 마음을 조금 더 헤아릴 수 있게 된 듯했다.


내 아이는 어느덧 커서 아빠가 돌아가셨던 그때의 나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난 아이에게 종종 외할아버지를 추억하며 이야기하곤 한다. “외할아버지는 정말 재미있고 다정한 분이셨어. 엄마를 많이 예뻐해 주셨어.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는데, 그곳에서 연이도 지켜보고 계신대. 엄마는 오늘 외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아이는 어느 날 공원에서 비눗방울을 불다가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좋은 생각이 있어. 여기 비눗방울에 외할아버지한테 마음을 담아서 올려 보내자. 그러면 하늘나라까지 닿을 거야.” 울컥했다. 마음이 찡했다. 내 말을 마음에 담고 기억해 준 아이에게 고마웠다. 난 오늘도 아빠가 보고 싶다. 아이가 말한 것처럼 비눗방울에 내 마음을 담아 전하고 싶다. 만남과 헤어짐이 있다는 걸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끝이 있기에, 지금 함께 하는 이들과의 시간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용기 있게 더 사랑하며 살게요. 하늘나라에서는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