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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원산책 Sep 14. 2022

매듭 짓기

2021년 한 해, 나는 몸과 마음이 온통 지쳐 있었다. 건강검진에서 내 간 수치는 평균치의 3배를 웃돌아 약을 먹기 시작했고, 원인 모를 복통이 잦았다. 생전 안 나던 코피도 나기 시작했다. 새롭게 맡은 업무는 아직 손에 익지 않아 효율적으로 해내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아이 하원을 내가 담당하고 있었기에 오전에 이모님이 오시는 시간에 맞춰 일찍 출근을 한 후 밀도 있게 일하고 칼퇴근하는 것이 매일의 목표였다. 빨리 퇴근하지 못한 날 부랴부랴 유치원에 달려가면 두세 켤레의 작은 신발들만 남아있곤 했다. 회사에서는 내가 아이 엄마인 것이 변명이 되게 하고 싶지 않았고, 일을 잘 해내고 싶었다. 전세 대출금도 더 빨리 갚고 싶었다. 경주마처럼 달렸다. 내 삶에서 ‘잠시 멈춤’ 신호에 불이 들어온 것을 감지한지 벌써 몇 년 되었지만 노력하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많이 다그쳤던 것 같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오던 지난 해 초여름, 가장 가까이에서 손발 맞춰 일하던 동료가 암 선고를 받았다. 갑작스러웠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동료의 휴직과 수술 소식에 걱정이 밀려왔고, 함께 하던 프로젝트도 문제였다. 설상가상으로 아버님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워낙 정정하셨기에 충격이 컸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어느 날, 아이에게 눈을 자꾸 깜박이고 목을 가다듬는 증상이 보였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괴로웠고 목을 가다듬을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다. 마음이 덜컥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던 내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무엇이 정말 중요한가. 어떻게 살 것인가.


퇴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잠시 멈추지 않으면 내가 없어져 버릴 것 같았다. 당장 내려놓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연 단위 프로젝트성 업무라서 담당인 내가 끝맺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책임 있게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연말에 퇴직하기로 했다. 퇴사 일자가 하루하루 다가왔다. 12월 23일, 마지막 출근을 했다. 출근 후 오전에 남은 업무와 인수인계를 마무리했다. 책상을 정리하고 쌓인 먼지를 닦았다. 함께 하던 이들과 점심을 먹고 차를 마셨다. 연말이라 휴가자들이 많았지만, 남아 있는 이들에게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하고 짐을 들고 일어났다. 우리 팀 동료들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나도 이전에 퇴사하는 선후배들을 이렇게 배웅해 주었기에 이들의 마음을 안다. 이심전심이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그 순간, 이제 진짜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그리고 문이 닫힐 때까지 손 흔들어주는 동료들이 보였다. 순간 눈앞이 흐려졌다. ‘정말 힘든 한 해였는데 잘 버텼구나. 수고했어. 잘 마무리했어.’하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한 해를 보내면서 긴 터널을 지나는 느낌이었는데 이제 막 빛으로 빠져나온 것 같았다. 중간에 도망치고 싶은 순간들도 있었지만, 끝까지 마무리를 잘 지을 수 있어 기뻤다. 개운했다. 비로소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적절한 타이밍에 멈출 용기를 낸 것에 대해 자신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멈춤을 회피와 동일시하지 않고 깔끔한 마무리를 지어서 뿌듯하다. 하나의 매듭을 짓고 다시 미지의 시간으로 발을 내디딘 것이다. 사색하고 더 많이 대화해보고 정말 소중한 것들에 삶의 우선순위를 두려고 한다. 용기 있는 선택이 준 축복의 시간이다. 살아 숨 쉬는 이 시간이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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