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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완 Oct 18. 2021

삶을 바꾸려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사람은 몸으로 산다

 매주 정해진 시간에 한 번, 나는 노인의 집을 찾았다. 노인은 자신이 깨달은 비밀을 내게 일러주었다. 나는 받아 적기도 하고, 골똘히 생각하기도 하며 노인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이야기를 듣고 돌아오면 일주일 동안 배운 것을 실천했다. 때론 버겁기도 하고 빠뜨리는 날도 있었지만 노인의 가르침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마치 내 모든 것을 내던지듯이. 삶을 바꾸어보겠다는 간절함으로. 그렇게 일 년을 보냈다. 


 그리고, 내 삶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묵묵히 노인의 가르침을 옮긴다.


삶을 바꾸려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몸이다.


몸을 바꾸어야 한다.


 삶은 결국 몸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사람은 몸을 통해 산다. 몸으로 산다.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 몸을 바꾸면 삶이 바뀐다고 할 수 없겠지만, 삶을 바꾸려면 몸을 바꾸어야 한다. 명심하라. 변화는 몸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 몸과의 연결이 긴밀해지면 긴밀해질수록, 우리가 몸을 수용할수록 인식의 폭이 넓어진다. 우리가 몸에서 떠나갈수록, 동시에 인식의 능력과 감각도 잃어버린다. 저조한 삶이란 인식하는 힘이 부족하고 감각이 둔한 나머지 삶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다. 다시 말해, 저조한 의식 수준의 상태이다. 저조한 의식 수준이 곧 저조한 삶이다.


 우리가 몸에서 떠나버릴 때 가장 먼저 잃는 것이 몸의 감각이다. 허기를 인식하지 못한다. 추위와 더위를 외면한다. 피로함을 무시한다. 저조함과 불쾌함을 무시한다. 몸의 감각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즉 인식의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가장 기피될만한 일을 떠맡는다. 인간은 몸의 감각을 외부의 사건에 투영하게 마련이다.


 이들은 자기 몸을 학대한다. 스스로 고행의 길을 걷는다. 몸의 감각을 억압하는 것이 고결하다고 착각한다. 몸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밤을 새워 공부한다. 야근을 자처한다. 희생한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노력한다. 몸을 소진한다. 몸의 감각이 살려달라고 애원할수록 감각을 억압하고 통제한다. 동시에 행복은 멀리 사라지고 만다.     


 개인이 갖는 세계관은 그의 몸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세상은 원래 두렵고 힘든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세상이 자신을 억압하고, 세상에는 좌절과 고통이 가득하며, 결코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 느낌은 사실 자기 몸에서 흘러나오는 감각을 외부에 투영한 것일 때가 많다. 인간은 단지 체력이 없고 지구력이 부족하고 힘이 없고 피로하고 아프기 때문에, 그 감각을 외부에 투영하는 일이 잦다. ‘세상이 날 피곤하게 만들어.’라는 생각 속에는 사실 ‘나는 피곤해.’라는 진실이 숨어있다.     


 그러므로 운동을 통해 체력을 끌어올리는 것만으로도 세계관, 내적인 힘, 삶의 태도가 바뀌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이 감각과 감정을 혼동한다. 허기지고 불쾌할 때. 배가 고프고 추울 때에는 좋지 않은 감정이 일어난다. 그때 마주한 현실은 모두 좌절과 절망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다가 몸이 편하고 배가 부르며 따뜻할 때 마주한 현실은 희망과 행복의 가능성으로 가득해 보인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행복한 경우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아니다.   


 감각을 인식하기 어려운 사람은 자신의 감정도 혼동하는 경우가 잦다. 화가 나면 심장이 뛰고 근육이 경직되고 동공이 확대된다. 사랑에 빠지면 심장이 뛰고 근육이 경직되고 동공이 확대된다. 분노와 사랑은 분명 다른 감정이지만 신체적 반응은 비슷하게 나타나므로 감각을 혼동하는 사람은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 분노와 혼동한다. 사랑할 때 화를 낸다. 


 이완과 슬픔도 혼동한다. 편안할 때 심장 박동은 느리게 뛰고 근육은 이완되며 동공은 축소된다. 슬픔과 저조함을 느낄 때에도 심장박동은 느리고 근육은 이완되며 동공은 축소된다. 평온함과 슬픔의 신체적 감각을 구분하지 못하면, 그는 평온할 때마다 슬프고 저조하다. 평온할 때마다 불안하다. 기분 좋아야 할 때에 울적하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은 너무나 많다.     


 신체적 감각을 왜곡 없이 인식하는 것이 삶을 되찾는 첫 번째 혁신이다. 연결은 인식을 만든다. 인식은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준다. 통제력이 늘어나면 관리할 수 있게 된다. 


 불안할 때 떨지 않는다. 화날 때 단지 신체를 조절하는 것으로 분노를 누그러트릴 수 있다. 사랑과 행복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누릴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 행복을 표현할 수 있다. 불편함을 인지할 수 있다. 지금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다. 내가 지금 느끼는 감각을 알아차릴 수 있다. 내 몸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시 말해 내 삶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 몸의 감각을 되찾는 순간 우리의 삶도 되돌아온다.     


 많은 사람들이 불쾌함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쾌와 불쾌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 불쾌함은 결코 우리의 불행이 아니다. 삶은 쾌와 불쾌가 반복되는 것 자체이며 우리는 이것을 피해서는 안 되고 피할 수도 없다. 불쾌함을 향해 저항할수록, 그것을 억압하거나 억제하거나 외면하려 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운명으로부터 어긋난다. 우리가 불쾌감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수용하는 일, 우리 몸의 감각을 받아들이는 일, 우리 몸의 감각이 들리는 곳에 우리를 두는 일, 즉 우리 삶을 더 좋게 흐르게 할 일뿐이다. 감각을 억제하는 것은 삶의 절반을 보이지 않게 가리는 것이다.     


 몸을 인식하는 범위는 감각을 통해 확대된다. 감각을 존중하고 수용할수록 후각과 미각, 시각과 청각, 촉각으로부터 건네받는 정보는 다양하고 풍성해진다. 감각을 통해 몸을 정확히 인식하게 된다. 감각을 억제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그저 받아들인다. 좋으면 좋은 것이고, 불쾌하면 불쾌한 것이다. 몸과의 연결이 긴밀해진다. 동시에 간결해진다.



 노인의 첫 번째 강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삶을 바꾸고 싶은가? 몸을 바꾸어라.

 정확히 말해, 당신의 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몸과 긴밀히 연결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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