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사람을 무릎 꿇게 하고
나는 한동안 생각에 대한 태도를 점검하며 시간을 보냈다. 생각을 살피고 알아차리며 그것과 거리를 두며 시간을 보냈다. 쉴 새 없이 피어오르는 생각들로부터 한걸음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내가 자주 하는 생각이란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를 향한 불안, 상처, 자기 회의와 같은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었다. 몇 년째 이어져오는지 모를 만큼 나와한 몸이 되어버린 생각들이고 습관이었다. 그러나 이제 다른 태도로 대하기 시작했다. 생각들은 내 것이 아니었다. 그저 피어오르고 지나가게 두면 될 일이었다.
생각은 내 것이 아니라는 태도의 변화만으로도 좋지 않은 생각들은 슬며시 사라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울컥하는 억울한 생각이며 나의 처지를 비관하는 생각들, 불안한 생각들과 반드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들은 그저 생겨났다가 나를 지나갔다. 바라보고 알아차리면 사라졌다. 생각들은 내 것이 아니므로 내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나는 예전보다 더 침착해졌고, 차분해졌으며, 더 단순해졌다.
나는 여태껏 생각의 노예였다. 생각이 피어오르면 그것과 하나가 되었다. 피어오르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 쓸모없는 생각들, 불필요한 생각들에 하나가 되어버린 채 그 생각들에 복종했다. 최면에 걸린 것처럼 생각들에 순응했다. 그 생각들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성찰도 없이, 그저 내 안에 일어난 생각이라는 이유로 그것을 내 안의 것, 혹은 나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살았다. 생각은 나를 늘 학대했다.
부정적인 생각은 현재에서 이탈하게 한다. 부정적인 생각은 강렬한 나머지 주의를 빼앗아 간다. 그래서 지금, 여기, 현재, 진실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우리의 시선을 훔쳐버린다. 여기에서 모든 고통이 발생한다.
'생각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처음엔 내 인식 바깥의 것이었으나 이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유익한 태도였다. 특히 부정적인 생각을 자주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커다란 전환을 가져다줄 수 있는 관점의 전환이었다.
일주일 뒤, 나는 다시 노인을 만났다. 보다 차분해지고 침착해지고 집중할 수 있게 된 내 모습은 노인의 눈에도 다르게 보이는 것 같았다. 몇 가지 질문과 응답이 오고 간 뒤 노인은 내게 물었다.
그래.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나는 대답했다.
생각은 없고 태도가 있습니다.
노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껄껄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좋네. 생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느낀 모양이군. 그건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지. 차라리 절간의 스님들이 매일 연습하는 것과 비슷해.
사람은 인생의 어느 순간 수도자가 되어야 한다네. 누군가는 수도자로 태어나기도 하지. 거리낌 없이 자신을 껴안고 살아도 순리대로 살아가고 삶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어. 운이 좋은 사람들이지. 그러나 대부분은 수도자가 돼야 할 수밖에 없어. 바로 나와 자네 같은 사람 말일세. 삶에 휩쓸려 지독한 고통과 고난, 회의, 슬픔, 분노에 휩싸이는 사람들 말이야.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반드시 다른 길을 찾아내야 하는 사람 말일세. 이 우주는 참 얄궂게도 받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소중한 것을 주는 법이지.
고통은 사람을 무릎 꿇게 해. 다시 말해 고통은 진실로 소중한 것을 받을 태도를 지니게 한다네.
그날 나는 노인에게 명상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