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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현 Mar 22. 2020

밀란 쿤데라에 대한 파편적 단상들

사진첩을 뒤지다가 밀란 쿤데라 <농담>의 여러 구절들을 오랜만에 다시 봤다. 그의 소설들에 대한 감상을, 적어도 인상 정도는 정리하고 싶었고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짧게 적기로 한다.




쿤데라 소설의 흥미로운 점은 주인공인 지식인-전문직-남성이 일련의 사건들에 의해 부풀려진 자의식을 인정하고 완전히 버리는 것에 있다. <농담>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그렇다.


그렇다, 추방된 자라는 내 운명을 나 역시 영웅화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된 자만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내가 검정 표지 속에 보내진 것이 내가 용감했기 때문도 아니고, 투쟁을 했기 때문도 아니며, 내 생각과 다른 생각들에 대항하여 싸웠기 때문도 아니라는 것을 냉정하게 상기해야만 했다. 그렇다, 나의 전락에는 그 어떤 진짜 드라마도 선행하지 않았고, 나는 내 이야기의 주체라기보다는 차라리 대상에 가까웠으며, 그러므로 (괴로움, 깊은 슬픔, 실패 등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면) 내 이야기를 가지고 무언가 대단한 척 내세울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 농담, 203p.


반면 여성 캐릭터는 그만큼 잘 쓰지 못한다. 완전히 벽에 가로막혀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남자 작가가 생각하는 ‘사랑하는 상대로서의 여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쿤데라가 그 사실을 작중 인물을 통해 낱낱이 고백한다는 것이다.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예술하는 남자들이 이거 하나만 잘 알아도 좋을 것 같다)


언제나 나는 루치에가 내게 일종의 추상이고 전설이자 신화라는 생각을 즐겨 되뇌어 왔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적인 말의 배후에서 전혀 시적이지 않은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루치에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가 실제로 누구인지, 그녀 자체로서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어떤 사람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존재를 오로지 (청년기의 자아 중심주의에 빠져 있었던 탓에) 나에게로 (나의 고독, 나의 예속, 애정과 사랑에 대한 나의 욕구로) 곧바로 향해 있는 측면에서만 받아들였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내가 체험한 상황의 기능에 불과했다. 내 삶의 이 구체적인 상황을 벗어나는 모든 것, 그 자체로서의 그녀 모습은 모두 간과되었던 것이다.
— 농담, 419p.




무엇보다 그의 책에서 집중하게 되는 건 캐릭터보다는 심리 묘사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섬세하고도 집요하게 파헤쳐지는 감정과 특히 불안에 대한 묘사들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첫 장을 펼쳤을 때부터, 이 소설에 완전히 매혹당했고 읽기를 멈출 수 없었다. 어떤 기간 동안은 테레자에 심리적으로 완전히 공감하기도 했다. 지금 다시 읽으면 그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시기적으로 잘 맞았다. 불안은 구체적 문장으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힘을 잃는다.


그것은 처음부터 악몽이었다. 다른 알몸 여자들 틈에 끼여 발을 맞추어 행진한다는 것은 테레자에게 가장 일차적인 공포의 이미지였다. 녀가 어머니 집에 살던 시절 욕실을 잠그는 것은 금지였다.  점에 대해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몸도 다른 사람의 몸과 다를  없다. 너에겐 수줍어  권리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일한 형태로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감출 이유가 없다. 어머니의 세계에서 모든 육체는 같은 것이며 줄줄이 발을 맞춰 행진하는 형상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테레자에게 있어서 나체는 집단 수용소에서 강요하는 획일성의 상징이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93p.


아래 인용은 <정체성>의 한 구절인데, 그가 묘사한 불안 중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다.


‘그리고 이렇게 시간이 그에게 흘러간다.’라는 말은 근본적 문장이야.
그분들의 문제는 시간이고, 시간을 흘러가게 하고, 절로, 그분들은 힘들이지 않고, 걷다가 지친 사람처럼 굳이 시간을 따라가지 않고 흘러가게 하는 것, 그게 중요한 것이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아주머니는 말을 하는 거야. 아주머니가 쏟아내는 단어는 슬그머니 시간을 움직이게 하는 반면 아주머니 입이 닫혀있으면 시간은 정지되고, 묵직하고 거대한 시간이 어둠 속에서 뛰쳐나와 불쌍한 아주머니를 공포에 떨게 만들지. 그래서 겁에 질린 아주머니는 누군가를 찾아 수다를 떠는 거야, 맞아.
— 정체성, 89p.




그의 책 중 마지막으로 본 무의미의 축제는 이전의 특징들을 다소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읽었다. 무의미를 사랑하기.


다르델로, 오래전부터 말해 주고 싶은 게 하나 있었어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죠. (…)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 무의미의 축제, 147p.


이런 이야기를 하는 책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른 부분은 다 제쳐두고서라도. 내가 읽었던 쿤데라의 소설 중 이 소설만이 유일하게 사랑과 그로 인한 불안에 병적으로 파고들거나 끔찍하게 고통받지 않는다. 나이가 든 만큼 그에게도 변화가 있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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