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드리 Nov 26. 2021

생일에는 미술관을 가요

도쿄역 미츠비시 1호관 미술관&카페 1894

차분한 공간, 넉넉한 시간, 넘치는 생각에 사치스러웠던 하루. 카페1894의 디저트와 커피. 칸딘스키의 콤포지션을 이미지화 했다.

 딱히 만날 사람이 없어도 생일만큼은 특별하게 보내고 싶다. 반백수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일본에서 홀로 보내는 첫 생일만큼은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쓰고 싶었다. 일주일 전에 예약해둔 시부야에 헤어숍을 들러 아침부터 머리색을 밝게 바꿨다. 직원이 요즘 일본에서 유행이라는 웨트 오일을 발라 줬는데, 금세 앞머리가 갈라져 마치 비를 맞은 사람 처럼 보였다. 도대체 이런 것이 왜 유행이람.


 하늘은 흐리고 으스스했다. 무엇을할까 고민하다가 올해는 미술관에서 생일을 자축하기로 했다. 요시노석고 컬렉션전시가 한창인 미츠비시 1호관의 포스터를 기억하고 있었다. 도쿄역으로 향하는 평일 낮 지하철은 조금 한산했다. 전시를 보고 근처 카페에 들러 디저트를 먹을 생각이었다. 혼자 노는 즐거움은 이런 소소한 나만의 공식을 지키는 일이다. 


 도쿄역에서 내려 걷다보면 누가봐도 이 건물이겠거니 하는 붉은 벽돌로 쌓은 미술관과 카페가 모습을 보인다. 미술관은 1894년 미츠비시 1호관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미술관 옆에는 은행 창구로 쓰였던 공간을 복원한 카페 1894가 있다. 안쪽 광장을 영국식 정원으로 꾸며놓았는데 마치 시간을 뛰어 넘어 19세기 말쯤 와 있는 기분이 든다. 

인스타그램 캡처

 요시노석고는 1901년의 야마가타현의 요시노 광산에서 석고 원석을 채굴한 것에서 시작한 일본의 건자재 대기업이다. 홈페이지 설명 등에 따르면 사내의 창조적인 환경 만들기를 목적으로 1970년대부터 일본 근대화, 1980년대 후반부터 프랑스 근대화를 사 모았다고한다. 요시노석고 컬렉션은 1991년 요시노석고가 고향인 야마가타 미술관에 작품 18점을 기탁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르누아르, 모네, 피사로, 샤갈…. 듣기만 해도 쟁쟁한 인상파의 중심을 이루는 화가들의 작품들을 시작으로 시슬리, 피카소, 드가 등 추가 기탁을 이어가면서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컬렉션으로 이름을 날렸다. 나는 들뜬 마음을 조금 억누르며 오늘 만큼은 시간 제한 없이 이 유명한 그림들을 음미하리라 별렀다. 겨우 여유 시간을 확보하고 나서야 그림을 볼 수 있는 한국에서의 나날과는 다르리라. 


 입장료 1700엔을 내고 돌로 만든 하얀 계단을 최대한 천천히 우아하게 걸었다. 전시장부터는 나무바닥재가 깔려있었는데 구두굽 소리가 울리지 않도록 최대한 뒤꿈치를 들고 걸었다. 전시장 조도가 상당히 낮아 마치 별이 쏟아지는 마술경 상자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평일 낮인데도 사람들을 꽤 마주쳤다. 아마도 주말에는 발디딜 틈이 없을 것 같았다. 


 사진촬영은 금지됐다. 사진 남기기를 좋아하지만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일본의 관람 문화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시선이 머무는 그림은 최대한 천천히 오래 오래 뜯어보고 마음에 남기려고 했다. 어떤 그림에선 아기 분내가 났고 어떤 그림에선 햇살이 쏟아졌다. 바람이 부는 작품도 있었다. 그러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모습을 떠올렸다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했다. 

인스타그램 캡처


 한시간쯤 흘렀던 것 같다. 예상보다 그림이 너무 많아서 덜컥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커피와 디저트 생각이 간절했다. 나는 곧장 태도를 바꿔 설렁설렁 그림을 보고서는 기념품 코너를 지나쳐 카페 1894로 향했다. 이곳은 시청률 50.4%의 경이적인 기록을 남긴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이케이도 준의 소설 원작)에서 주인공 한자와가 커피를 마신 공간이기도 하다.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가 8m나 되는데다 1894년 은행의 모습을 고스란히 복원해 클래식하면서도 색다른 느낌을 주는데 금색테를 두른 아치형 칸막이와 화려한 기둥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전기를 대신해 가스등을 쓰고 있는 것도 카페의 분위기를 낭만적으로 느끼게 했다. 나는 따뜻한 커피와 바실리 칸딘스키의 콤포지션을 이미지화 했다는 디저트를 주문했다.


 딸기를 올린 빨간 무스 케이크와 말린 오렌지, 초코케이크 위에 말차맛 막대 초콜릿을 교차해 놓은 것이 킨딘스키 작품의 교차된 대각선을 떠오르게 했다. 오랜 시간 스타벅스 커피에 길들여진지라 커피는 맹맹한듯 심심했다. 디저트의 맛도 황홀한 디저트 전문점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다만 미술관에서 한껏 고양된 기분을 가지고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디저트 플레이트를 즐겼던 그 여유와 풍성함 만큼은 기억에 남을 만큼 좋은 것이었다. 


 “야, 너도 나이 먹어봐라. 생일 그거 아무 것도 아니야.”

 스물 몇살쯤, 정작 생일날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없는 (전) 애인에게 투정을 부리자 이런 말을 들었다. 그때는 “그래도 생일 날인데….”하고 우물쭈물하고 말았는데, 생각해보면 미리 선물도 축하도 다 받아놓고 왜 당일 그 말 한마디에 집착했는지 의문이다. 그때는 혼자 노는 법을 몰랐을 때라 그렇게 그게 서운했는지.


 생일을 맞을 때 마다 표면적인 숫자나 양보다는 질 좋은 경험을 많이 쌓아 나가자는 다짐을 한다. 풍요에 대한 감도를 높여 나가면서 주어진 시간과 곁에 있는 사람, 지금 여기를 천천히 음미하는 것. 그러고보니 떠들썩 했던 도쿄의 이미지도 언젠가 부터 차분한 공간들로 채워지고 있다. 단기 여행자나 장기 체류자, 도쿄에 정착하려는 의도가 없는 어중간한 중기 체류자가 경험하는 도쿄는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Happy birthday to me!


매거진의 이전글 ‘떡순이’의 대놓고 도쿄 떡 탐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