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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드리 Sep 28. 2021

이노카시라 공원과 따뜻한 차이티

외로울 땐 혼자 걸었다


 도쿄에서 얻어 살던 맨션은 너무 추웠다. 일본에는 온돌이란 개념이 별로 없다. 유카단보(일본식 온돌)가 깔렸다는 선배네 집도 뜨뜻미지근했다. 건조한 공기가 싫어서 온풍기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 나는 니토리(일본의 대표적인 잡화가구점)에서 산 아이보리 색 전자 담요를 아예 두르고 살았다. 맨발생활을 했던 나는 도쿄의 겨울을 보내면서 실내에서도 두툼한 양말과 슬리퍼를 신게 됐다. 


 도쿄 도심에서 서쪽, 사무실이 위치한 카스미카세키역에서 전철로 30분 거리쯤 걸리는 스기나미구 아사가야에 집을 얻었다. 역에서 집까지는 성인 여자 걸음으로 2~3분이면 충분했다. 평발인 나는 오래 걷는 게 힘에 부치는데 역에서 걸어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역과 가까운 곳에 집을 빌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JR아사가야 북쪽 출구를 나와 짧은 쇼텐가이를 빠져나오면 조용한 주택가가 펼쳐진다. 아사가야는 조용하고 평범한 주택가 같지만 오래 전부터 만화, 연극, 각종 문화 예술인이 모여 사는 소박하면서도 활기가 넘치는 동네다. 

 아사가야의 일상이 작품의 배경이 된 만화도 있다. 후쿠오카 출신의 만화가 아베 신이치의 <미요코 아사가야 기분>이 대표적이다. 그는 1970년대 연인이자 뮤즈였던 미요코와 아사가야에서 보낸 청춘의 나날을 기반으로 아방가르드한 주제의식의 만화를 그려냈다. 

 영역판 <That Miyoko Asagaya feeling>은 2020년 만화계의 아카데미 상으로 불리는 아이즈너 상의 아카이브 부문 후보로 오르기도 했고 앞서 2009년 7월에는 감독 츠보타 요시후미의 손을 거쳐 영화화 됐다. 한국에서는 아사가야가 빠진 <미요코>로 소개됐다. 


 아사가야에서 거주했던 맨션은 1K(분리형 원룸)지만 4층이고 발코니가 있는 집이라 햇빛에 빨래를 말릴 수 있었다. 욕실과 화장실과 완벽히 분리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발코니에 작은 의자를 구해다 놓았는데, 멀리 전철이 다니는 모습, 작고 반듯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 앞집 발코니에 걸어둔 빨래가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 누군가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모습 같은 걸 느긋하게 앉아 구경하곤 했다. 높은 건물이 없어 온도, 습도, 계절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하늘색을 관찰하는 일도 재미있었다. 오후 5시면 근처 초등학교에서 챠임벨과 함께 노래 같은 것이 들려왔다.  노래를 들으면 파블로프 실험실의 개처럼 배가 고파졌다. 


 도쿄는 바람도 세게 불고, 비가 자주 내렸다. 취업을 하고 서울에 혼자 살면서 나는 자취 집에 TV를 놓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일본어 공부를 핑계로 모니터 크기의 작은 TV를 설치했는데 바람이 세거나 비가 오면 하늘 구경 대신 TV를 봤다. 하는 게 없는데도 한국에서 일할 때보다 일본에서의 시간이 더 빨리 갔다. 인터뷰를 하거나 지인을 만나는 시간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래서 가끔 외로웠다. 외로울 때는 TV를 보기 싫었다. 


   그때는 집에서 전철을 타고 두 정거장쯤 떨어진 기치죠지에 내려 걸었다. 지브리 미술관으로 유명한 이노카시라 공원이 그곳에 있다. 기치죠지는 한때 매년 젊은 도쿄인들 사이서 ‘살고 싶은 곳 1위’를 차지한 동네다. <기치죠지만이 살고 싶은 거리입니까?>라는 마키 히로치의 만화는 물론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까지 있을 정도다. 기치죠지는 시인 백석이 도쿄 아오야마가쿠인대학 고등부 영어사법과를 다닐 당시 살았던 동네로도 알려져 있다. 


 역에서 나와 건널목을 건나 커다란 쇼핑몰들을 지나 공원 가는 길을 따라 걷다보면 통유리 창으로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감각적인 헤어샵이라든지 아기자기 한 소품샵, 세련되면서도 단정한 색의 간판을 단 빵집 등이 눈에 띈다. 그렇게 5분여 정도를 걷다보면 공원에 도달한다. 

   연인과 함께 정동길을 걸으면 결국 헤어지게된다는 슬픈 전설처럼 이노카시라 공원에서 연인이 함께 오리 보트를 타면 헤어진다는 도쿄인들만의 도시 전설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에이 말도 안돼요. 사람은 언젠가 모두 헤어져요”라고 했다.


 찬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면 발도 아프고 금세 따뜻한 커피나 차 생각이 난다. 이땐 공원 초입으로 발을 돌려 차이 티를 마셨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면 따뜻한 온기와 함께 특유의 향이 훅 뺨에 부딪혀온다. 목 넘김 끝에 걸리는 특유의 그 쓴맛이 너무 좋았다. 가끔은 디저트나 타이업 메뉴를 시키기도 했다. 디저트도 발군이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면 오그라든 마음이 살짝 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정체돼 있는 내가 마음이 들지 않을 때, 사람들과의 대화가 자꾸 어긋날 때, 감정이 폭주할 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에 집착하게 될 때 기치죠지의 차이티가 생각난다. 


 누군가의 글에서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 평생의 과제였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다는 문구를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멋진 문구여서 수첩에도 적어놓았지만 나는 그렇게 괴롭게 살고 싶지 않다. 내가 너무 가엽고 안쓰러울 때, 그때 마다 나를 달래는 방법을 조금씩 늘려가는 것. 그렇게 세상 누구보다 따뜻하게 나의 삶과 성장을 보듬어 가고 싶다. 


 차를 마시면서 조용히 나와 대화하다 보면 혼자 있지만 외롭지 않다. 이 마법을 서른셋이나 되어 겨우 알게 됐다. 앞으로 일어날 많은 이벤트 속에서 실망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일도 생기겠지만 그때마다 지나침이 없도록 하고 싶다. 그러고 보면 이국에서의 일상은 매일이 다짐이었던 거 같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성껏, 충분히 자신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 얼마나 값진 경험인지 도쿄의 시간은 가르쳐줬다. 오늘은 오랜만에 공원을 걷고 이왕이면 따뜻한 차이 티를 마셔야겠다.  



 <외로운 마음에 따뜻한 차와 디저트를 처방합니다. 맛있는 차이티 가게는 JR기치조지 이노카시라 공원 방향에서 도보로 약 4분 거리에 위치 한 차이브레이크(chai break). 스리랑카 찻잎을 수입해 쓴다고 합니다. 홍차와 디저트도 있어요. 운영 시간은 8시~19시. 매주 화요일은 정기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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