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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드리 Oct 23. 2021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도쿄 바 '센티포리아'

인연의 실이 이끄는 곳

 “전 칵테일을 즐겨 마셔요. 칵테일을 마실 때면 예쁜 보석을 고르는 것 같아서 호사스러운 기분이 들죠.”

 선배가 사랑하는 검은 머리 아가씨는 “실은 태평양이 럼주이기를 바랄 정도로 럼을 사랑하는” 술꾼이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소설을 애니메이션화 한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교토 폰토쵸의 밤거리를 배경으로 하룻밤 동화 같은 이야기를 선사한다. 


 검은 머리 아가씨는 선술집이 다닥다닥 늘어선 폰토쵸를 걷고 우연히 만난 춘화 수집가 도도와 칵테일을 마시고 이윽고 사채업자 이백과 술 대결을 펼친다. 그러다가 헌책 시장에 가고 학교 축제를 갔다 감기에 걸린 사람들에 병문안에 나선다. 

 검은 머리 아가씨에 첫눈에 반한 선배 역시 같은 시간 폰토쵸를 걷는다. 그러다 이백의 패거리에게 바지를 강탈당하고, 우연히 도움을 요청한 도도와 술을 마시고, 헌책 시장을 갔다가 학교 축제에 갔다 감기에 걸린다.

 검은 머리 아가씨와 선배는 그날 밤 서로 의식하지 못하고 스치거나 엇갈린다. 그러나 전지적 시점의 우리는 금세 이들이 결국 무엇인가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둘이 잘 되었느냐고? 글쎄. ‘넌 왜 거리를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냐’는 이백의 질문에 대한 검은 머리 아가씨의 답변이 힌트가 될 수 있을는지. 

 "인연이 실이 절 이끌었어요."


 시한부 도쿄 살이를 했던 나는 그곳 도쿄에서 어떤 인연의 실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늘 기대했다. 도쿄서는 차를 소유하지 않았으므로 검은 머리 아가씨처럼 밤에 걷는 일도 많았다. 평소 서울에서라면 절대 하지 않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를테면 홀로 바에 앉아 칵테일을 주문하는 일,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일, 공원에서 도시락을 먹는 일, 먹고 싶은 떡을 위해 한 시간 이상 줄을 서는 일 따위의 것들. 이 중에서도 칵테일은 약속 없는 날 밤의 나를 늘 특별하게 만들어줬다. 그렇게 혼자 칵테일 마시는 즐거움을 알아버렸다. 

 

 롯본기 역에서 도보로 약 10분, 아자부주반 역에서는 코앞 거리에 있는 바(bar) 센티포리아는 검은 머리 아가씨의 말대로 ‘예쁜 보석을 고르는 것 같은 호사스러운 기분’을 선사한다. 

 스파클링 와인과 딸기를 베이스로 새빨간 장미를 얹은 센티포리아의 시그니처 칵테일을 처음 봤을 때 정말 이걸 다 마셔 없애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아까운 기분이 들었으니 말이다. 


 시그니처 칵테일을 한 잔 마신 뒤에는 라가불린16을 주문했다. 마스터는 날렵해 보이는 작은 일본도로 눈앞에서 얼음을 깎았는데, 그의 박력 있는 칼질에 각얼음이 금세 다이아몬드 얼음으로 변신했다. 황금빛 위스키와 섞이면 진짜 보석처럼 얼음에서 빛이 났다. 나는 태평양 바다가 모두 라가불린16 이기를 바랐다. 


 마지막 잔은 산뜻하고 가벼운 칵테일을 마셨다. 소주에 탄산과 유자즙을 섞어 석류를 으깨 얹은 칵테일을 좋아했는데, 이 칵테일을 주문한다는 건 센티포리아의 밤을 마무리하자는 일종의 신호였다. 신호를 주지 않으면 아침이 올 때까지 혼자 앉아 술을 마시다 가진 돈을 모두 탕진할 것 같았다. 

 어쩌다 나는 홀로 앉아 칵테일을 마시는 즐거움을 알아버렸을까. 새하얀 연미복을 차려입은 후쿠오카 출신의 젊은 칵테일 아티스트의 황홀한 칵테일을 보고 있자면 당장에라도 오늘 밤 어떤 운명을 마주하게 될 것만 같았다. 하룻밤 사이 어쩌다 내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바꿔버릴 어떤 대단한 운명 같은…. 아,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도 나는 늘 운명을 기다리는 그런 기분을 간직하고 싶다. 운명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가슴이 콩닥 뛰고 가늘게 뜬 두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지금 만나는 사람, 지금 하는 일, 지금 이 순간이 모두 나의 운명이라면 1분 1초도 허투루 쓸 수 없는 일이다. 


 “오드리, 인간이 의지를 가지면 인생 아주 고달파 지는 거야. 운명대로 살아 운명을 거스르겠다는 의지를 가지 말고.”

 언젠가 친구 A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그럴싸한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지가 지닌 숭고함, 비장미 나아가 인간의 의지가 남긴 위대한 업적을 헐뜯겠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지나친 의지를 가진 인간의 일상을 상상해 볼 때 나는 그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다. 


 행복하고 싶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엔 모든 것을 하늘의 뜻에 맡길 수밖에. 운명을 따라 산다면 승패 득실 여부를 떠나 내게 눈 앞에 주어진 모든 운명을 사랑 할 수밖에 없다.  


  취기가 올라 도쿄 밤거리를 걸을 때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이백이 떠올랐다. 이백은 물처럼 흐르는 시곗바늘에 둘러싸여 죽어 가고 있었고, 검은 머리 아가씨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인생은 짧아, 사랑을 해라 아가씨야"



<도쿄에서 홀로 조용히 칵테일을 마시고 싶다면 100개 이상의 꽃잎을 가졌다는 장미, 센티폴리아에서 이름을 따온 BAR CENTIFOLIA(バー センティフォリア를 추천해요. 차분한 분위기여서 여자 혼자서도 부담스럽지 않아요. 주소는 東京都港区麻布十番1丁目6−5 ラミューズ麻布十番ビル6F. 03-6455-4479. https://goo.gl/maps/RatcgYvXevo7J2EW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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