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규호 Nov 16. 2024

공존

주로 수필춘추에 냈던 글들.

‘뱀 같은 지혜를 가져라.’ 뱀을 사갈시 하는 성경에서 왜 뱀을 비유해 지혜를 가지라 했을가. ‘나는 네가 총명하기보다 인내 가지기를 바란다.’ ‘인내는 무사장구의 근본이요.’지혜와 인내, 인생이란 강을 건너기 위해 반드시 둘다 필요한 것이다. 둘 다 내게 부족한 것 같지만 말이다. 삶은 왜 어려울까? 불교에선 삶이 고해(苦海)라고 하고 이유는 집착 때문이다. 성경에선 세상 권세는 마귀에게 있다고 했다. 다소 모순이다. 세상은 모두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일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봤다. 현재만도 벅찬데,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과거에 대한 후회로 우린 더 힘든 것 아닐까. 과거에 대한 후회는 영혼을 좀 먹는다. 그래 체념이 필요하다. (현재는 시간이 아니다. 마치 점이 공간이 아닌 것처럼) 그래도 지난 시간은 결국 허무한 것이다. 잘 못 살고 후회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다소 서글퍼진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삶을 보존하려는, 생을 보존하려는 리비도의 에너지와 삶을 해체하려는 죽음의 타나토스가 우리 안에 공존한다. 욕망의 리비도는 기본에너지다. 나르시즘을 일으키기도 한다. 죽음의 욕망은 아이러니하지만 동시에 생의 긴장을 없앨 수 있는 것이다. 유기체에서 다시 무기체로. 죽음으로 고통은 분명 끝이 난다. 괘락도 끝일지 모르지만. 물론 천국을 소망하나, 천국은 이 세상과 분명 다를 것이다.

산다는 건 욕망한다는 것이다. 성적 욕망을 넘어서 잘 살고 싶은 것이다. 채근담에선 많이 바라는 것이 비극의 시작이란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바라는 복(福)과 욕망(慾望)의 차이점이 뭘까. 

기독교가 기복신앙이라고 비판 받지만 성경엔 분명 세상에 기대지 말라는 메시지가 있다. 불교에선 집착에서 벗어나 무아의 경지에 이르라지만 불상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또 인간적인 것이다. 우리 아이, 우리 가정, 건강, 직장..

보존과 해체의 공존, 세상에 대한 소망과 체념의 공존.

일이라는 것은, 직장은 세상과의 다리라고 한다. 일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마르크스는 일이 기계의 부품일 뿐이라고 했다. 다른 관점. 이 관점의 차이가 비극을 낳는다고 본다.

두려움이 용기로 바뀔 수 있듯이, 비극마저 카타르시스로 승화된다면 세상은 한번 살만할지도 모른다. 공존하기 위해서 채근담의 중용이 떠오른다. 적당하다는 것. 뜨겁거나 차가우라고 했다지만 그럼에도 적당한 것! 이 세상은, 인생은 지혜도, 인내도 필요하지만, 인생은 이를 사느니 차라리 꿈꾸는 편이 날 것이다..

사람들은 선아니면 악이라지만 두가지는 공존한다. 한곳에 동시에 공존하기도 하고, 동전의 앞뒷면처럼 딱 잘라내기 어려운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절대적 상대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아리송한 일에 많이 접할 수 밖에 없다.

죽음이란 것은 분명 삶에 반대되는 터부시되는 것이지만 삶의 마지막 모습, 곧 삶의 목표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니, 죽음은 그저 끝이고 그 전까지의 삶이 목표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사실과 거짓 또한 공존하기에 뱀 같은 지혜가 절실하다. 구별하기가(tell) 정말 어려운 것이다. 진정한 친구가 누구인지, 나는 누군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선택한 것인지. 

꼼꼼한 것은 성실하지만 신경증으로 이어지면 곤란하다. 한쪽에선 장점이 다른쪽에선 단점이 될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절대우위는 누구에게나 있으니 비교해서 낙담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일념이 곧 무념이라고 했다. 온갖 잡념이 방해할 때면 한가지 생각에 몰두해야 할 것이다. 인생은 살아내는 것이고, 세상과 공존해야 하니까. as possible as I can. 

작가의 이전글 기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