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춘추 '25년 봄호 제출작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장기 용어로 내가 먼저 산 후에 적을 공격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대로 직역하면 내가 산 후에야 남을 죽일 수 있다. 지극히 당연한 말 같지만, 진리란 순리에 따르는 것이고 이처럼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죽어서도 상대방을 이겼다. ‘사공명주생중달’, 죽은 공명이 산 중달(사마의)를 이겼다.
초한지 초나라의 항우는 사면초가의 위기에서 일단 목숨을 살리라는 조언을 듣고도 염치가 없다며 최후를 맞는다. 성웅 이순신은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더 이상 적과 싸울 필요가 없어서인지 최후를 맞이한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우리가 하루를 보낸 것은 하루 더 죽음에 다가간 것이지만, 하루를 또 살아낸 것이다. 하루하루가 기적이니까. 그러니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
성경에선 자기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자 죽을 것이요, 예수를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 했다. 아생연후살타는 전략적인 말인지만, 한편으로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의 변명으로 들릴 수도 있고, 한편으론 자중자애와 맞닿아 있는 것도 같다.
살아남은자의 슬픔이란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트라우마를 말하지만, 살아남은 자는 죽은자를 보며 으스대지만 죽어야 할 인간이란 행복해하지말라고 오이디푸스의 소포클레스는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삶과 죽음은 굳이 살것이냐 죽을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의 햄릿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생을 살아가는 필부들의 문제로도 치환 되는 것이지만, 매일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일상의 문제가 될 뿐아니라 오히려 정신병으로 치부될 위험마저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죽음을 논하는 것은 이것이 철학의 어두운 면일 수도 있고 인간 심연의 문제는 욕망뿐만 아니라 종교와도 화하는 일종의 레토릭이자 클리셰를 뛰어넘는,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새 방구석에 들어앉은 젊은이들이 많다지만 그들은 일종의 신선 또는 예전의 양반 같을 지도 모른다. 젊은이들의 아픔을 공감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찬양만 할 수도 없다. 다만 밖에 뛰어나가 부디치길 조언할 뿐이다.
방구석 딜레탕트 이든 시대의 혁명가이든, 달리 말하면, 천재이든 바보이든 죽음은 비켜 갈 수 없다고 했다. 언제인가 없어질 내가, 영혼은 영원할 것이라 믿는다고 지금 글을 쓰는 행위는 파도위에 써레질을 하는 것처럼 부질없는 일이나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믿으면 그건 일종의 혁명적 행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위무하는 행위도 하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행동도 하지만, 때론 교만하게, 때론 위축되어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데, 일단 내가 산후에야 적을 무찔러 승리에 이르듯이, 당장 지금이라는 시간에서 허기를 면하고 살아남기 위하여 변명하고 위선적 행동을 하고 그럼에도 누군 살아남지 못하고, 또 누군 경쟁을 포기하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가.
희생양! scape goat. 희생양은 이성이 지배하는 21세기에도 필요한 것인가.
‘여기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아라’(요한 1:35-42)
남을 죽이기 위해선 살아남아야지만, 남을 살리기 위해선 스스로 죽는 경우도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부모님 무덤은 동산공원에 있다. 가면 아버지는 1941년 생(生), 2021년 졸(卒)이라고 되어 있다. 부모님이 없어도 살아간다.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간다. 아버지의 일생은 81살에 돌아가셨으니 81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까? 인생이란 간략히 태어나 살다 죽다. 한문장으로 요약할 수도 있지만, 생이 끝이 아닐것이라 믿는 것이다.
오후 2시경, 벌써 2시네. 하루 참 빠르다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저 멀리 들린다. 난 오늘 하루를 살았다. 오늘 하루를 살아냈다. 모니터 화면 옆엔 사는게 다그래 란 책이 보인다. 이제 몇분후면 주말이다. 생과 사를 논하던 나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분리수거를 하러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