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배낭여행 - 미얀마, 바간
배에서 내리자 먼지가 가득 묻은 얼굴의 아이들이 환하게 웃으며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먹을 것을 달라는 제스처였다. 가지고 있던 과자 몇 개를 쥐어주고, 숙소로 가는 마차를 탔다. 한참을 가다 보면 도시 입장료를 받는 사람들이 나왔다. 바간에는 도시 입장료가 있다. 25,000짯으로 3일 동안 유효하다. 파고다를 들어갈 때마다 이 티켓을 보여줘야 하는데, 검사를 한 적은 딱 한 번 있었다.
도착한 호스텔은 호텔방을 개조해서 시설이 꽤 좋았다. 호텔 방에 침대를 넣어놨지만, 그래도 널찍했고 훌륭한 조식과 수영장도 이용할 수 있었다.
바간에 온 이유는 단 하나, 일출과 일몰을 보기 위해서다.
양곤이나 만달레이와는 다르게 정말 미얀마스럽다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도시의 느낌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2차선 도로 위로 소음이 없는 이 바이크들만 왔다 갔다 한다.
식사를 마치고 얼른 잠자리에 들었다. 일출을 보기 위해서는 새벽 4시 반 기상이다.
4시 반에 일어나 보니 이미 우리 방 사람들은 다 나가고 없다. 바간에서는 4시 반에 일어나는 우리는 부지런한 새가 아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핸드폰 라이트 하나에 의지해서 전 날 체크해놓은 시크릿 파고다로 향했다.
불빛도 인기척도 없었는데, 올라가 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파고다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우리도 쥐 죽은 듯이 일출을 기다렸다.
그러나 첫날의 일출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구름이 잔뜩 껴서, 둥둥 떠 있는 열기구만 구경할 수 있었다. 조그만 파고다에 옹기종기 모여서 다들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숙소로 돌아와서 훌륭한 조식을 먹고 보니 이제 아침 7시 반이다.
하루는 길고, 일몰까지는 시간이 또 아직 많이 남았다.
바간에서의 하루는 이렇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일출을 보고 식사를 하고, 책도 읽고,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일몰 시간에 맞춰서 해가 지는 풍경을 보고 숙소로 들어와서 잠에 든다.
93세까지 장수하신 우리 할아버지의 삶과 똑같다. 어두컴컴한 새벽에 인기척에 눈을 떠 보면, 할머니와 함께 불도 키시지 않고 도란도란 얘기하시던 그 그림자가 생각이 난다.
그렇게 바간에 있는 3일 동안 우리는 구름 끼지 않은 일출과 일몰에 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는 왜 구름 없는 깨끗하고 맑은 그 하늘을 당연히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내일이면 바간을 떠나기로 한 날이다.
4일 차 아침, 새벽에 눈을 뜨는데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그냥 일출을 포기하고, 숙박을 연장하고 잠에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잠만 잤다. 잠도 자고, 핸드폰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체력 하나라면 정말 자신 있던 나였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출과 일몰을 보지 못한 것도 성질나는데, 몸이 아파서 일정도 연기해야 하다니…
다음 날 새벽, 바간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이다.
파고다로 향하기 전 하늘을 보는데, 구름이 한 점 없고 하늘이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드디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출을 봤다.
저 멀리 해가 떠 오르면서,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세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붉은 하늘에 펼쳐진 열기구들과 아침을 시작하는 새들의 분주함이 장관을 이루었다.
전 날, 바간을 떠나기로 했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두통으로 일정을 연기해야 했다. 아마도 그 두통은 원했던 일출과 일몰을 보지 못하고 떠나야 한다는 그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그 하루 때문에 의도치 않게 하루 더 머물러야 했던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있었다.
저 일출을 보고 나는 생각했다.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나 보다. 다음부터는 좀 더 유연하게 생각해보자. 만약 내가 이 일출을 못 보고 떠나야 했으면, 나에게는 이 아름다운 바간에 또 와야 할 이유가 생긴 거잖아? 그런 아름다운 핑계라면 100번도 더 대고 싶다!’
그나저나 일출 끝장나게 예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