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 알지. 너무 잘 알지.'
10여 년 전 '천송이 코트 사태'에 관한 뉴스가 들려올 때마다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에서 온 그대'가 대히트를 친 뒤 중국을 비롯한 해외 소비자들이 '천송이 스타일'의 옷을 구매하러 온라인 쇼핑몰에 몰려왔지만, 공인인증서를 비롯해 한국의 인터넷 보안 시스템 때문에 구매를 할 수 없었다는 안타까운 사태였다. 미국에 오래 살고 있는 나는 인터넷이 활성화된 이후 20년이 넘게 줄곧 각종 천송이 코트를 경험해 왔다. 간단하게는 온라인 서점에서 (전자)책을 주문하는 일부터 중요한 은행 업무까지 한 번에 깔끔하게 처리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해외 카드라서 거부, 해외 카드를 사용할 수 있으나 인증 불가라서 거부, 공인인증서가 만료돼 거부, 공인인증서 갱신은 본인이 직접 은행에 와야 한다며 거부 등등 그나마 처리가 완료되면 운이 좋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한국 물건을 온라인으로 사는 일은 포기한 지 오래고, 은행은 그나마 외국계 xx 은행이 자랑하는 '공인인증서가 필요 없는' 인터넷뱅킹을 이용할 수 있어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사용하고 있다. 행여나 계정이 잠겨버려 지점 방문 없이는 해결이 안 될까 봐 늘 우려하면서.
실낱같은 인터넷뱅킹으로 만족하던 내가 높디높은 본인 인증의 벽을 다시 만났으니 그건 지난 글에서 언급한 텀블벅 프로젝트였다. 본인 명의의 휴대폰 없이는 인증 불가라는 텀블벅 측의 안내는 정말이지 짜증 나는 것이었다. 네이버나 카카오톡은 국제 문자로 인증이 가능한데 말이다. 네이버 계정의 본인 인증 과정에서 문자가 갈 거라고 했을 때 '이게 온다고?' 하며 반신반의했는데, 휴대폰에 도착한 문자를 보니 미세한 감동이 일었던 기억이 난다(다른 업체들의 경우 문자를 보냈다고 하는데 받지 못한 경험이 몇 번 있었다). 암, 고객 유치에 이 정도 노력은 기울여야 하고 말고. 그 정도에 만족하고 살다가 출판사를 해보겠다고 다시 본인 인증의 벽을 넘으려 하니 약간 골치가 아파오기는 한다. 그것 때문에 안 할 수는 없지 않나.
'그래, 내가 이번 가을에 한국에 간다. 가서 내 명의 휴대폰을 만들어 준다.’
한국 방문을 앞당기겠다고 결심하고 나니 벌써 기분이 좋아졌지만, 한국 휴대폰은 내가 한국 땅을 밟고서 신분증을 들이댄다고 해서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한국에 살았더라면 쉽게 해결되는 이 일이 내게는 4개월여에 걸쳐 고개를 10개쯤 넘어야 가능하다. 첫 단계는 미국 FBI 범죄경력조사였다. 우체국에 가서 지문을 채취한 뒤 FBI로부터 범죄 사실이 없다는 증명서를 받아야 하는데, 아무 우체국은 안 되고 해당 기기를 갖춘 우체국에서만 가능하다. 5분 거리에 동네 우체국을 놔두고 집에서 45분쯤 떨어진, 용건이 없다면 절대 가지 않을 동네로 가야 했다. 인터넷에서 지문 채취를 미리 신청했고, 운영 시간을 확인한 뒤 집을 나섰다. 주차장도 없어 복잡한 길에 주차하고 부랴부랴 들어갔더니 2시 25분경이었다. 3시가 마감이니 늦은 건 아니었다. 내 차례가 되어 창구 앞에 섰더니 직원이 2시가 마감이라며 나중에 다시 오란다. 헐. 정보를 제대로 업데이트해 두던가!
며칠 뒤 좀 더 이른 시간에 다시 갔다. 이번에도 안 해주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창구에 가니, 여권을 신청하는 어느 가족과 나 이렇게 둘 뿐이었다. 내가 두 번째니 금방 하겠지 하며 기다렸지만, 50분이나 기다리게 만들었다. 여권 신청에 50분 이상이 걸리는 것을 도대체 누가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어쩌겠나. 고풍스러운 우체국 내부를 찍으면서 화를 삭일 수밖에.
"내 출판사에서 내 번역서를 내보고 싶어요."
라고 대답할 것 같다. 왜 이런 수고를 사서 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말이다. 내 명의의 한국 휴대폰을 갖는 일은 좋은 혹은 재밌는 책을 찾아 (판권을 사서) 번역해서 책을 만들고 판매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 10개 고개에다가 출판업 등록을 위한 5개 고개쯤 더하면 출판사를 차릴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를 차린다고 해도 아마 10고개는 더 넘어야 매출이란 것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총 25개 고개를 넘어야 하더라도 꼭 해보고 싶다. 공동 작업을 통해 책을 출간해 보니 책을 만드는 재미와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체국 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