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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번역가 Jul 07. 2023

함께함의 맛을 보다(2)

우리가 선택한 작가는 페미니스트 소설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케이트 쇼팽이었다. 첫 번째 스터디에는 번역 작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쇼팽이 작품활동을 했던 시대적 배경과 지역적 배경, 작가 정보, 작품 정보, 페미니즘에 관해 조사해 오기로 했다. 드디어 첫날이 되었다. 순서대로 각자 발표를 하고 내 차례가 왔는데,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는 게 얼마 만이었던지 생각보다 떨렸다. 몇 분 안 되는 발표 시간에는 앞이 깜깜해서 내가 눈을 감고 있는 줄 알았다. 뭐라고 말을 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산 티가 여실히 드러났다. 많은 청중 앞에 선 것도 아니고 발표 내용이 어려웠던 것도 아닌데 어버버 하다가 끝냈다. 부끄러웠다. 어설픈 내가 부끄러웠다는 점을 제외하면 우리의 첫 스터디는 꽤 성공적이었다. 공동 번역을 기획하기 전에는 잘 몰랐던 작가에 대해 두루두루 알게 되어 케이트 쇼팽이 한층 더 가깝게 느껴졌고 다음번 스터디에 대한 기대가 커졌으니까 말이다. 그 다음번 스터디에서는 각자 선정한 작품을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봤고, 그러고는 번역을 했고, 다른 멤버들의 번역을 첨삭했고, 혼자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의견을 구하고 함께 토론하면서 번역을 다듬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 단계씩 밟으며 공동 작업을 착착 진행해 나갔다.


누군가 내게 함께 스터디를 하면서 좋았던 점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만큼 진지한 동료들과의 소통이라고 말하고 싶다. 무인도에 살고 있던 내게 종이컵 전화기가 주어진 것 같다고나 할까. 비록 그 가느다란 실이 언제 끊어질지 몰라 벌써 아쉽고 얼굴을 맞댈 수 없어 답답해도 무인도인에게 소통 상대가 생겼다는 사실은 큰 변화였다. 단조로운 일상에 활력이 생기니 기획 아이디어도 샘솟았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두고 함께 소통하게 되니 그 맛이 과히 달콤했다. 내가 이곳에 살면서 그런 소통에 얼마나 목말라했는지를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단맛을 오래도록 맛보고 싶었지만 바라는 대로 되지는 않았다. 혼자만의 세계에는 비교할 대상이 없으니 외로움은 있어도 비교의 고통은 없는 법이다. 하나둘씩 스터디 멤버들의 데뷔 소식을 들으며 타인과 비교하며 괴로워하는 못난 내 자아가 드러나 버렸다. 혼자만의 세계에 사느라 그동안 잊고 있었던 쓴맛이 되살아난 것이다. 나만 뒤처진다는 불안감이 증폭되었고, 내가 그렇게 부족한가 하는 열패감이 일상을 흔들었으며,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질투하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지금까지 좋은 클라이언트들을 만나 일하며 잘 살고 있었는데, 쓸데없이 한국의 번역 아카데미를 수강하는 바람에 안 봐도 될 쓴맛을 본 것 같아 후회스러웠고, 다시 내 세계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지금은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냐고, 경쟁은 나 자신과만 하자라는 자기 계발서에 나올 법한 말로 스스로 달래며 지내는 중이다.





지난 10년간 잊고 지내던 단맛과 쓴맛을 보는 사이에 우리의 공동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고, 이제 곧 전자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기획부터 번역과 에세이(이것도 있다!)로 구성된 원고의 탈고, 전자책 제작까지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나는 그동안 해보고 싶었지만 엄두도 못 내던 일을 해봐도 되겠다는 희망을 봤고, 내친김에 실험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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