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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동 Jun 16. 2021

할머니와 나의 동거 생활

할머니와 나는 띠동갑이다. 

그것도 60갑자까지 똑같은 띠동갑!

즉, 할머니께서 환갑을 맞는 해에 내가 태어났다.     

그 때문이었을까? 막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형제 중 할머니와 가장 많은 사연(?)을 가진 이가 바로 나였다는 걸!     

국민학교 입학식 날 왼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달고 어색하고 긴장되면서도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드넓은 학교 운동장에 서 있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엄마 손 대신 할머니 손을 잡고서…….     

내가 다섯 살이 되던 무렵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엄마는 친척의 소개로 멀리 마산에 있는 한 회사의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날로부터 내가 아홉 살이 될 때까지 할머니는 졸지에 아버지와 우리 다섯 남매를 위한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     

우리 할머니는 우리가 상상하는 자상하고 인자하신 그런 할머니가 아니었다. 버럭버럭 소리도 잘 지르고, 웃음은커녕 잔잔한 미소조차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좀 억세고 무서운 할머니였다. 무뚝뚝한 데다가 고래고래 소리 질러대는 할머니 곁에 어린 내가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위로 오빠 언니들은 나름 다 커서(?) 할머니의 손이 크게 필요하지 않았지만, 막내인 나는 달랐다. 어른의 손길이 아직은 많이 필요한 나이였다. 

요즘 같은 시대라면 언니들 역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손이 따라야 할 어린 나이지만, 내가 자랐던 그 당시 우리 시골 마을에서는 아이가 어느 정도 걷고 뻘뻘 돌아다닐 줄만 알아도 저 혼자 크겠거니 여겨서 그냥 내버려 두고 막 키웠다.




내가 그때 뭣 때문에 혼났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기억으로는 세수하면서 옷이 좀 젖어서 짜증을 냈던 거 같다.      

난 옷 목둘레선이 젖으면 몹시 찝찝해했다. 옷이 좀 젖었다고 해서 홀딱 갈아입을 수도 없다. 옷도 흔치 않거니와 요즘처럼 세탁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사소한 걸로 빨랫감을 함부로 만들어 내는 일 역시 허락되지 않았다. 

그땐 우리 할머니도 엄했지만, 우리 집 분위기도 좀 그랬다. 어른들은 식전부터 들에 나가 일하는데, 아이들이 아침 식사가 나오도록 세수도 하지 않고 눈곱을 붙인 채로 밥상머리에 앉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건 게으름의 표본이었다. 어린 나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 아이들한테 그리 너그럽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 바람에 식전 댓바람부터 할머니한테 혼나서 맨발로 집 밖으로 쫓겨났다. 그렇다고 할머니가 나를 쫓아오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난 집 밖 어귀에서 맨발로 서성이면서 집으로 들어갈 엄두를 못 냈다. 서성이다 지치면 가끔 흙바닥에 주저앉아 그림도 그렸다. 그러다가 이른 아침 들일을 하고 지나가던 아저씨가 들어가라고 재촉하면 마지못해 집으로 들어갔다. 그럼 할머니의 화도 어느 정도 풀렸는지 별말 없이 내가 들어 오는 걸 모르는 척했다. 난 소리 없이 들어가서 밥상에 남은 내 밥을 찾아 먹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난 그때마다 밖으로 도망갔고, 할머니 역시 몇 번 소리 지르다 말고 그랬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난 할머니를 조금씩 덜 무서워했던 거 같다.     




한번은 내가 열이 많이 오르고 무척 아팠다. 가난한 형편의 시골 아이들은 어디가 조금 아프다고 해서 약을 먹곤 하진 않았다. 나 역시 그런 아이 중 하나여서 처음 먹어보는 약이 참 힘들었다. 

    

아마 그때 내가 심하게 아파서 아버지께서 안 되겠다 싶었는지 면 소재지에 있는 약국에 가서 약을 지어 왔다. 저녁밥을 먹고 아버지께서 약을 먹이려고 하는데, 약봉지를 보니 알약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것을 한꺼번에 입으로 털어 넣으면서 물을 먹고 삼키라 하는데, 난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삼키지 못한 약들은 입안에 계속 머물렀고, 그 약들이 입안에서 녹기 시작하는데, 그 쓴맛이란……! 난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결국 토하고 말았다. 

귀하디 귀한 약을 그렇게 토해내고 나니 아버지께서는 엄청 화가 나셨고, 나를 한쪽으로 밀쳐냈고, 난 엉엉 울었다. 그날 밤 약 먹기는 끝내 실패였다. 


다음 날 창호지 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환한 것으로 봐서는 시간이 꽤 지난 아침인 듯했다. 부스스 잠에서 깨어나니 할머니께서 조그만 밥상을 들고 들어오셨다. 다른 식구들은 이미 아침을 다 먹고 난 다음인 듯했다. 

밥 한 공기와 지난 제사상에 올렸던 귀한 조기 한 토막을 다시 조린 것이 상에 올라와 있었다. 할머니께서는 손수 조기 살을 발라 내 밥숟가락 위에 조금씩 올려 주었다. 

따뜻한 밥 위에 올린 간간하고 부드럽고 졸깃한 조기 맛…… 난 지금껏 그렇게 맛있는 조기를 두 번 다시 먹어보지 못했다. 짭조름한 조림 국물까지 남김없이 다 먹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약 봉투와 물을 가지고 왔다. 지난밤 아버지께서 한 것처럼 한입에 약을 다 털어 넣게 하지 않고, 약 한 알을 입에 넣고 물을 마셔 삼키게 했다. 이상하리만큼 약이 잘 넘어갔다. 그리고 또 하나를 주고…… 그렇게 그렇게 해서 약을 무사히 다 먹을 수 있었다. 


약을 다 먹고 나자, 어디서 났는지 알록달록 색깔이 입혀진 커다란 박하사탕을 줬다. 그 사탕을 입 한가득 물고 있으니 아픈 게 다 나은 것 같았고, 그렇게 달콤하고 행복할 수가 없었다.      

난 커서도 한동안 그날 할머니께서 가르쳐준 방법대로 약을 먹곤 했다. 약 한 알에 물 한 모금 또 한 알에 물 한 모금…….     




여름 모내기가 끝난 들에는 해야 할 일이 또 남아있다. 그 건 다름 아닌 논두렁 콩 심기였다. 콩 심는 일은 할머니와 나의 몫이었다. 

할머니께서 먼저 둔탁한 칼로 구멍을 내면서 앞장서 가면, 난 그 구멍에다가 두세 개의 콩을 넣고 손으로 꾹꾹 눌리며 구멍을 막으며 뒤따라갔다.      

모내기가 다 끝난 들녘은 온통 초록으로 뒤덮고 있고, 멀리서 간간이 들리는 뻐꾸기 소리가 전부일 뿐 참으로 고요했다. 순간 무서운 맘이 깃들면 할머니를 놓칠세라 콩을 얼른 넣고 재빨리 눌러 재치며 할머니의 뒤꽁무니를 바짝 쫓았다. 그러다 보면 급한 맘에 콩이 두세 개가 아니라 서넛이 들어가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멍을 꾹꾹 막아 버렸다.       

 

논 두렁콩 심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간혹 반가운 아저씨가 동네 어귀에 와서 소리쳤다. “하~드~ 하~드~!” 너무나 즐거운 소리지만, 항상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돈을 내고 하드를 사 먹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간혹 비료를 뿌리고 남은 빈 포대가 있으면 그것을 하드로 바꿔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포대마저도 너무나 귀한 우리 집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콩을 심고 온 날에 딱 맞게 하드 장사가 오는 날이면 할머니는 비료 포대 하나를 꺼내서 내 손에 쥐여 주면서 하드로 바꿔 먹게 해주었다.      

난 그 맛을 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달콤함을 넘어서 시원함과 부드러움…… 먹기가 아까워 혓바닥으로 조심조심 빨아서 아껴아껴 먹는데도 금세 드러나는 하드 꼬챙이를 보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 달콤함이 눈 녹듯 사라면서 나도 점점 커갔다.




다섯 살 때 멀리 식당 일을 하러 가셨던 엄마는 내가 아홉 살이 되어서야 완전히 돌아왔다. 그전에도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 한 번씩 다녀가셨지만, 그 시간은 바람같이 사라졌다. 


6학년이 되었을 때, 오빠 언니가 도시로 가면서 나도 거기에 더불어 딸려 갔다. 자연스레 할머니께서는 우리들의 생활을 돌봐주시는 역할을 또다시 맡게 되었다. 낯선 도시에서 시작된 할머니와 나의 동거 생활은 또 그렇게 시작되었다. 

언니 오빠는 바쁜 일과로 함께 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함께 보내는 사람은 할머니와 나 둘뿐이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보내주는 부모님의 생활비는 그리 넉넉지 않았기에, 할머니는 많지 않은 돈으로 살림살이를 하느라 무진장 아껴 쓰셨다. 

해 질 녘이면 집에서 얼마 안 되는 거리의 시장을 걸어서 다녀오시곤 했는데, 사 오는 것이 파, 두부, 감자 정도가 전부였다. 어쩌다 쥐포 같은 마른 반찬거리도 사 오시는 듯했지만, 우리가 먹는 밥상에는 항상 빠져있었다. 

몰래 찬장을 살펴보면 거기엔 맛있게 조림된 쥐포 반찬이 어김없이 있었다. 그건 늦게 오는 오빠의 몫이었다. 난 가끔 몰래 그 반찬을 훔쳐 먹기도 했다. 그러다가 걸리는 날엔 된통 혼이 났다. 일하고 늦게 오는 오라비의 반찬을 그렇게 먹어서 되냐면서…….


어떤 날엔 그 시장 나들이를 함께 할 때도 있었는데, 재촉해서 걸으면 금방 갈 그 길을 할머니는 정말 천천히 천천히 가셨다. 이 길이 우리 할머니한테는 참 먼 길일 수도 있었겠구나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 할머니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느라 나도 느릿느릿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 시장 입구에는 다양한 종류의 빵을 구워서 널따란 좌판에 펼쳐 놓고 파는 빵 가게가 참 많았다. 그 길을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흘낏 보면서 하나 골라보라고 하셨다. 그 수만 가지의 빵 중에서 단 하나를 고른다는 건 정말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심 끝에 고른 그 빵 맛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겠는가! 그런 맛에 난 좀 더 자주 할머니를 따라 시장을 가고 싶어 했다.


나도 조금 더 커서 용돈이란 것도 좀 생기고 했을 때, 그 시장을 지나칠 때면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할머니가 좋아하는 호떡을 사서, 그것이 식을세라 달려가 할머니와 나눠 먹었다. 할머니께선 그걸 참 좋아했다.    

 

그런 할머니께서 일흔다섯, 내 나인 열다섯이 되던 해 60년 띠동갑인 우리 할머니께선 멀리 하늘나라로 가셨다. 할머니께서 떠나시기 전쯤, 난 누구나 겪는 사춘기를 핑계로 할머니께 많이 대들고 못되게 굴었다. 그렇게 일찍 떠나실 줄 모르고…….


엄마와 함께하지 못한 어린 시절에 오랫동안 나와 함께 했던 우리 할머니! 소리 버럭버럭 지르는 무서운 할머니였는데도 내 기억 속 우리 할머니는 참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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