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들과의 시간은 내게 이런 말을 남겼다

by 래연



Avant Prologue



아이들이 어릴 땐 그만큼 나도 어렸었다. 반려묘들과 나는 마치 한 유치원의 또래 어린이들처럼 즐거이 어울려 놀았다. 서로 나이라곤 먹어가지 않을 것처럼 철모르고 행복했다. 아이들이 한두 살 때까지는.


그러나 아이들의 가장 아기답던 시절은 아주 빠르게 지나가고 어느덧 은근한 근심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지금 이 아이들과 이다지도 행복한데, 이게 영원한 게 아니잖아? 애들은 사람보다 수명이 짧으니 어느덧 늙고 아프게 되어 보내야만 하잖아?’ 이 사실을 의식하는 순간부터, 마냥 귀여운 아이들의 그 털 북실북실한 배에 코를 묻거나 혹은 시시때때로 들어 올리고 좋아라 껴안던 일은 이제, 유한성을 껴안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러던 나날 속에 아이들은 중년을 맞고 어느새 노년이 다가온다. 그 사이 병원에서 한 두 차례 크고 작은 수술을 받기도 했다. 이제 은근히 엷던 근심의 먹구름은 그 빛깔이 짙어져 간다. 이쯤에선 어쩔 수 없이 마음의 준비란 걸 하게 된다. 자주 시뮬레이션을 돌려본다. 언젠가 닥쳐올 그 큰 상실의 슬픔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에 대하여.


아마 반려동물과 같이 지내는 이라면 누구나 거쳐 가는 심정의 변화이리라. 같이 지낸 날들이 사랑스러웠던 만큼 더 아플, 그래서 더 맞이하고 싶지 않은, 그러나 반드시 오고야 마는 미래의 순간.

자주 상상해서 미리 아파 놓으면 막상 닥쳐 덜 아플 것도 같고, 어떻게든 나 자신의 예견되는 충격을 줄여 놓으려고 나도 여간 이 궁리 저 궁리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정말 그 순간이 다가왔고, 빼도 박도 못하게 그 순간을 겪어내야만 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죽음의 문턱까지 가, 이윽고 거기를 통과하기까지를 옆에서 지켜보는 과정 속에는, 단지 슬픔으로만 넘겨 버리기에는 몹시 귀한 무언가가 깃들여 있음을 느껴버렸다. 우리 반려 동물과의 만남과 이별 속에는 분명코 가장 큰 사랑의 신비로운 열쇠 같은 것이 숨어 있었다.


물리적 죽음이 죽음인 것이 아니라, 아무 의미 없는 허무야말로 진짜 나쁜 죽음이다. 살아서 가장 사랑스러웠던 우리 동물들은 우리에게 순전히 나쁜 죽음만을 주고 가지만은 않는다. 이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경험이든 그것이 허무로 귀일하지 않는다면 아픔조차 의미 있게 껴안을 만하다.



죽음이란 삶에서 가장 진한 순간이다.

아무도 직면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지만, 거기에 이르는 여정 안에 삶의 가장 큰 비밀이나 엑기스가 들어있다면 어쩔 것인가?

혹여 당신은 죽음에게 어떤 기대를 품을 수 있을 것인가?

더군다나 가장 사랑하는 존재하고의 이별에 대해서는?

세상에 버려질 시간이란 없다는 가정하에, 가장 가까운 것과의 결별을 말하련다.

헤어지지만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고양이들과의 지난 시간은 내게 이런 말을 남겼다.


헤어지지 않아, 영원과는

언제까지고 돌아올게요

언제든 곁으로 돌아온다고





천에 염색해본 아이들의 모습








Prologue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힘으로 하루들을 살아간다.

나날들이 아니라 하루들을.


그리움의 목적어인 저 ‘무언가’에는 무어라도 와도 좋다.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만 있다면.

그리움은 마음을 이동시킨다. 움직임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움직임이 없는 삶은 죽은 삶이다.

그리워할 수만 있다면 살 수 있다. 그리움이라는 작용을 통하면, 살아 있다고 믿으면서도 실은 은근히 삶 아닌 죽음을 덧대는 묵은 나날들을 홍해처럼 갈라낼 수 있다.


그런데 그리움의 대상들이란 시공간적으로 이미 멀어진 것들뿐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존재들일 수도 있다.

그것을 이야기하려 한다.

가까이 있는 것들을 그리워함에 대하여.



지난 수년간 여러 마리의 고양이들과 오래 살아왔다. 두 번 강산이 바뀌도록.

그렇다고 앞으로 고양이들과 함께 한 시간을 시시콜콜 모두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삶의 모든 에피소드를 다 책으로 쓰지는 않듯이.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은, 고양이들과 함께 한 가장 극적인 순간에 대해서이다. 이 순간을 알고 모르는 모두와 공유하고 싶다.

삶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바꾸어 말하면 가장 진한 순간이란 무엇일지에 대해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짐작한다. 어쩌면 모든 인간 혹은 존재들이 수많은 전생들을 거쳐 온 내력 속에서 공유하는, 집단 무의식이라 부를만한 마음의 공간 속에서. 그 순간은 다름 아닌 죽음이다. 삶의 끝에 오며 삶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죽음은 삶을 엿보는 창문이다. 그리고 내가 겪은 고양이들의 죽음이란, 그들과 함께 한 나의 삶을 돌이켜 보여주는 회고의 창문인 동시에, 우리가 채 알지 못하는 죽음 너머의 미지를 얼핏 엿보게 해준 신비의 창이었다. 그들이 임종에 가까워가는 마지막 몇 년 동안 아직 맞닥뜨리지 않은 무지 속에 두려워해 온 그들의 죽음은, 흔히 짐작할만하듯 그저 막연하고 하염없는 슬픔과는 확실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맞는 것은 짐작한 거와는 차이가 있다. 그 차이점은 막연한 무지 속에 짐작을 살고 있는 다수에겐 유익한 표본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내게 가까이 있었고 여전히 가까운 것들의 죽음을 말하려 한다. 이래야만 죽음에 대해 간직해온 진부한 허상 안쪽의, 허무로 덮여 보이는 삶의 속살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양이들의 죽음을 말하려 한다.

그것이 단지 슬프기만 했다면 말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