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이 글을 쓰게 된 건, 부지불식간에 중첩되어오던 하나의 불안을 타개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내가 앞둔 하나의 헤어짐에 대한 것이다.
지금 나는 여러 마리 고양이를 앞서 보낸 후 마지막 반려묘와 더불어 날들을 보내고 있다. 더는 고양이를 기르지 않겠다는 의미에서의 ‘마지막’은 아니다. 그보다는 좁은 의미에서, 내가 고양이들을 처음 길러 그들의 삶과 죽음을 한 번 거쳐본 그 하나의 주기 속에서의 마지막이다. 첫 고양이들을 나는 ‘나의 고양이 1기’라 부른다.
그러니까 나는 이 1세대 고양이 중 마지막 고양이의 마지막 날들을 함께 하는 셈이다. 아이는 아직 건강하고 잘 먹고 지낸다. 단지 다른 여타 동료 고양이들이 있을 때에 비하여 현저히 나에 대한 의존이 커졌을 뿐. 늘 나를 따라다니고 하루에 몇 번은 안아달라고 요구한다. 아이를 들어 올려 내 심장 가까이 안고 달래주어야만 이윽고 자신의 침상으로 돌아가, 주된 일과인 ‘잠자기’를 다시 시작하곤 한다.
마지막 날들이라는 말이 비정하게 들려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어느 생물체고 영원히 살 수는 없는 법인데 이 아이는 고양이로서는 이미 오래 살아서 그 생명의 끝까지 그렇게 많이 남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마지막임을 인정하고서 마지막 나날들을 끌어안아 주고자 한다.
내가 두려워하며 은근히 회피하는 태도가 오히려 이 귀중한 날들을 망칠 것이다.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된다.
이 아이와의 남은 날들을 두고서 구체적이고도 유일한 근심은, 내가 지켜보지 않는 시공간에서 아이가 쓸쓸히 죽음을 맞이할지 모름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를 함께해줄 수 있다면 그만큼 여한이 사라질 것이다.
두 해 먼저 그러니까 재작년에 세상을 일찍 떠난 맏이에게는 내 기도가 먹혔다. 맏이는 내 인생 고양이었다. 고양이지만 마치 인간의 마음을 가진듯한 이 녀석은 의사 표현이 무척 발달한 그 영민함으로, 나와 가장 소통이 잘 되는 아이였다. 이 장난꾸러기와 더불어 지내는 동안 난 지루할 사이가 없었다. 이렇게 나와 밀착된 아이의 마지막을 근심했다. 혹여 녀석이 나 없는 곳에서 죽게 될 가능성을. 그리하여 오래전부터 녀석을 들어 올려 안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늘 빌었다. 그의 마지막 순간에 꼭 붙어 있게 해달라고.
이 기도는 이루어졌고,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는 이야기가 진전되면서 더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또 기도한다. 지금 내 옆의 이 마지막 고양이가 내 눈앞에서 내 전송을 받으며 떠날 수 있길!
마지막 고양이 로리 아가였을 때
마지막 고양이만을 남겨둔 지금, 수개월 전 아주 힘들게 세상과 작별한 막내를 떠올리며 그 해의 처음으로 돌아가본다.
2021.1.1
이제 오늘로 내 고양이들 중 또 한 마리가 스무 살이 되었다.
그리고 고양이라는 종족과 산 지는 21년째. 같이 지내기 시작한 첫 몇 달이나 몇 년은 느리게 지나가고, 세월들의 중간 토막은, 돌아보면 사라지고 없다. 어느 고양이가 물어간 거야?
고양이 밥을 주는 걸로 늘 하루는 시작된다.
고양이들의 노예로 사는 게 사람들의 왕으로 지내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걸 대개의 집사들은 알고 있다. 사람들의 왕으로 지낼 일이 없으니 말이기도 하고, 뭐라도 비교 대상이 필요해져서 끌어와 말할 만만한 게 사람이라는 종족이다 보니.
그렇다고 동물들을 사람들보다 더 좋아하지는 않는다. 단지 인간의 이기적인 입장에서 공존이 좀 더 쉽다 여겨질 뿐이다. 특히 고양이들과의 삶은 노 리스크 빅 리턴이니만치.
보다 용기 있는 인간이라면 기꺼이 사람들을 좋아하려 할 테고, 용기조차 필요 없을 인간은 그냥 있겠지.
맏이 제롬이가 20살이 되던 2020년, 술빵으로 기념케이크를 만들기도 했다.
고양이를 변호하고 싶을 때가 있다. 고양이는 무심하고 시크하다는 둥 인간에게 관심을 안 주고 제멋대로라는 둥 하는 말들에 대해. 살아보고 길들이고 교감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고양이는 정이 많고 깊다. 다만 아무에게나 남발하지 않으며 서두르지 않을 뿐이다.
작년 새해 첫날 이 일기를 쓸 때만 해도 내게 큰 시련 하나가 문 앞에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모든 인간의 운명이 그렇게 생겨먹었듯.
2.6.
강변까지 다녀오는 길, 자욱한 안개로 인해 영화 속을 거니는 것 같았다.
며칠 안으로 한 번 되게 울 것 같다. 울먹울먹하다 도로 들어가길 여러 번, 언제 터질지 모른다.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그 찰나엔, 힘을 다해 버티느라, 어쨌든 그럭저럭 버텨진다고 스스로 믿게 되어, 스트레스 자체가 그리 큰 게 아니라고 내 마음을 자신에게 번역하게 되므로, 결국은 지나서야 제대로 된 그 크기를 알게 된다. 그 시간이 지나서 보면 그게 아니다. 버티기 힘든 걸 그저 참고 있는 거로 드러난다.그 순간엔 달리 어찌할 바를 몰라서.
지금 다른 무엇에 집중할 마음이 잘 안 나고 자주 울먹한 기분이 드는 걸로 보아 바로 그런 상태임을 짐작한다.
두뇌란 재빨라서 자기에게 닥쳐올 것들에 대해 순식간에 크로키를 한다. 구도를 잡아 그림을 그려놓으면 대강은 그 안에 다 들어갈 테니까. 머리로는 어제 동물병원을 오가는 동안 할 수 있는 모든 정리를 이미 다 해 놓았다.
비단 이 일뿐이런가? 살면서 닥치는 모든 일에 대하여 머리는 비할 나위 없이 지혜롭다. 딴에는 어떤 것을 바라고 무엇을 포기해야 할지, 욕망을 조절해야 할지 기대를 놔야 하는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정리를 다 한다 쳐도, 살아가는 마음이란 거의 늘 배가 고프고 찢겨있듯이.
누군가와 아무 말이나 하고 싶다.
모리 턱의 이상은 1월말에 처음 발견했다. 한쪽 턱이 부은 듯 딱딱하게 되어 있어 심상치 않았다. 일시적으로 부은 것이라고 보기엔 무언가 심각해다. 병원에 데려갔을 때 대번에 의사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엑스레이 상으로 그 뭔지 모를 종양은 턱의 조직과 얽혀 제거가 어려운 상태였다. 일단 조직 검사를 의뢰하기로 했지만, 엑스레이만으로도 상황이 좋지 않은 건 분명했고, 이제 남은 건 악질적인 종양이 맞는가를 확인하는 절차였다.
이때로부터 미국에서 검사결과가 오는 3주 정도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는 날들이나 다름 없었다. 아직은 먹고 자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어 보이는 모리에게 곧 죽음이 닥친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따름이었다. 모든 피조물에게 죽음은 오는 거지만 이런 식은 당혹했다. 마음은 잘 추스러지지 않았다. 체념 깃들인 최선을 준비하면서도, 주머니에 구겨넣은 마음은 자꾸만 흘러내렸고 주머니는 터져 새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