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읽어버렸다

by 래연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거야, 우리는


2. 21.

나는 참 쓸모가 없다. / 머리를 언젠간 잘라야지.

이 두 마디. 오늘 중 제일 많이 한 생각.

이 두 마디를 작년 내내도 반복했다.


더 자주 창을 열어 글을 쓰고 싶건만, 계속하여 열었다 닫기를 반복한다. 글뿐만 아니라 모든 걸 주저주저 서성인다. 내가 힘이 없다.

늘 간당간당하게, 만성 신경쇠약으로 살아가던 중, 이제는 같이 사는 고양이가 아프고부터 매사에 더욱 엄두를 못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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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드러나기 직전쯤 밥 먹던 모리. 이때만 해도 오래 함께해온 무사안일한 날들을 즐기며, 모리의 그림자가 늑대 같아 보인다며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요즘 들어 녀석은 밥을 더 자주 조른다.

턱에 종양으로 의심되는 것이 자라난 상태에서 먹이를 씹는다. 윗니가 아랫잇몸을 찍어 구멍이 나 있다. 그러나 고통을 못 느끼는 것 같다. 못 느끼는 상태라면 더 안 좋은 것으로 예측된다. 아이는 이전보다 더 자주 밥을 조르고, 아작아작 소리 내어 씹을 때마다 이전 같지 않은 턱 상황에, 볼 때마다 마음이 조아든다.


조직 검사 결과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직 검사 결과를 모르는 데서 오는 불안감 그리고, 어떤 쪽으로 결과가 나오든 신통하게 해줄 것이 별로 없다는 데서 오는 좌절감. 이 두 감정을, 밥 준 다음 씹는 걸 지켜보는 순간마다 되새긴다.

아이는 아직 밥을 무척 잘 먹고, 나는 마음이 썩 잘 삼켜지지 않는다.


이별 자체가 두렵기보다는, 이별에 이르기까지 녀석이 많이 아파질까 봐 안타깝다.

그래도 아직 안고 쓰다듬어볼 수 있는 고양이와, 그 고양이를 쓰다듬는 손과 품을 가진 내가 존재해서 다행이라고, 녀석의 눈을 보며 털을 만질 때마다 되씹는다.


시간과 운명과 고양이로부터 넘치게 받아왔고, 이제 나머지 숙제를 하는 중이다.

불과 3주 전에는 이 모든 상황의 반대편에서 그저 평화롭고 무탈한 나날들을 이어가고 있었다. 내 아이는 한 마리의 건강해 보이고 그저 귀여운 여느 고양이였을 뿐.

언제나 그렇듯 두 눈을 가린 무지가 보장해준 시간이었다.



기막힌 불의의 재난을 겪고서 다시는 그 이전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그렇게 되기 불과 며칠 전의, 닥쳐올 불행의 티라곤 조금도 나지 않았을 고요한 나날들을 헤아리는 상상을, 나는 그런 기이한 대비를 자꾸만 꺼내오는 버릇을 오래전부터 갖고 살았다. 현재에 계속 망각되는 어리석음을 조금이라도 돌이켜 자각하려는 무의식적 의도에서였던가, 삶의 값을 더 무겁게 음미하려 했던가.



모르고 누린 시간과 알고서 통과하는 시간이 있다. 둘 다 사랑에 꿰어져 있기는 마찬가지다.

아픈 고양이와 아픈 나는, 비록 동시에 손을 맞잡은채 그 문을 통과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결코 헤어짐이라곤 없게 될 어떤 절대적 공간을 향하여, 서로의 시간을 저어간다. 아픈 다리를 지근지근 눌러가며 걷고 있다.

같이 있을 때 정말 사랑을 느끼는 존재와는,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함께였었기에, 이 시간이 지난 다른 어딘가에서도 다시 함께하리란 믿음이 있다. 영원한 헤어짐 같은 건 희대의 악연들에게나 걸어보는 최대한의 희망일뿐.




맏이 제롬이가 있던 주방





고무줄 놀이

2. 26.

어떤 글들은 내 맘을 달래기 위해 쓴다.

모든 글이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더욱 그런 글들이 있다.


오늘은 모리의 검사결과를 들으러 간다.

선고를 들으러 가는 기분이다.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모리는 생사를 초월하여 나의 귀여운 고양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지만.



삶과 죽음 사이 그리고 삶의 모든 시공 속에는 투명한 고무줄이 놓여져 있다. 멀리서 보기엔 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걷는 자의 처지에선 보이지 않는 수많은 줄들을 건너가고, 헤쳐 가고 있을.

어린 시절 줄넘기줄을 아무 상념 없이 훌쩍훌쩍 넘어 다닐 땐 알지 못했을, 바로 그렇다고 인지하지 못했을 뿐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을.



한 아이가, 늘어나기도 끊어지기도 하는 고무줄을 넘고 디딘다.

한 아이의 형태로 거기 놓여 있기까지, 지구는 온 역사를 동원하여 지난히도 꿈틀거렸다. 그렇게 한 아이를 빚어 뱉어 놓았던 거고, 바로 그 한 아이가 자기를 거기 놓아준 바로 그 지구를 다듬이질이라도 하듯 발을 구르고 있다. 태엽 인형처럼 춤추며 훌훌, 무심한 고무줄 노랫가락을 흘려내리며.

무심한 듯 훌훌, 하지만 어떻게 몰랐겠는가?






서둘러 읽어버렸다

2. 27.



나는 시집을 야금야금

퍽 느리게 읽는 편이지

이 책을 다 읽도록

살아 있을 수 있을까,

내 고양이?


따스하게 밥 먹일 누군가가 있음

그이와 동시에 죽을 수 없음


땅콩 쿠키를 먹으며

죽음의 시를 읽는다


죽음의 페이지들을

설겅설겅 건너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