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에 가까워가며

by 래연






하지에 가까워가며


4. 27.

하나의 이벤트가 있으면 나머지는 대강 묻힌다.

14년도부터 죽 길러온 머리카락이 이제부터는 짧아지는 수순으로 정리에 들어갔다.

획을 긋는 행위 하나를 감행하자 나머지 일상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하루가 간다. 머리만이 제일 중요한 일이라는 듯이.


긴 머리가 그럭저럭 어울렸던 데다, 요새는 컨디셔너며 헤어 에센스며 각종 제품이 좋아서, 오래 길러도 손상이나 갈라짐이 전혀 생기지 않는 바람에 긴 머리에 더욱 애착이 생겨 그간 쉬 자르지 못했었다.

그러다 오늘에 이르러서야 감행했다.


대번에 숏컷으로 많이 자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이 상태에서 더 길어질 일은 없어졌다. 계속 짧아져 갈 거다.

머리카락의 동지가 지났다.

이제는 다시 오게 하지 않을 예정이다.





4. 30.

귀가하려면 도서관 앞을 거쳐가야 한다.

겨울 말쯤 여기에 고양이 여러 마리가 나타나 모여 있어서 지날 때마다 들렀었다.

어느덧 아이들은 나뿐 아니라 여럿으로부터 밥과 물을 얻어먹게 되었다.


모리가 아프기 시작할 때랑 겹치기까지 해서 이 아이들로부터 적지 아니 위로를 받았다.

이 아이들은 늘 사람들과 어우러져 있었다.

오가던 아이들 학생들, 직장인들이 벤치에 앉아 쓰다듬어 주거나 했다.

먹이에, 햇살에, 털에는 윤이 반드르르하게 나고 토실토실하니 보기 좋았는데......


어느새 이런 밥그릇과 페트병을 잘라 만든 물그릇까지 놓이게 되었을 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귀여워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이들이 보통은 두셋, 많을 땐 네 다섯 마리까지 되다 보니, 이 아이들을 고까워할 사람도 생겨나지나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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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어느 날 아이들이 통 보이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누가 겁을 주어 쫓아 버린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며칠 지나선 한두 마리가 가끔씩 잠깐 어슬렁거렸는데, 어느덧 바닥에는 못 보던 공지가 붙어 있었다.


당부드립니다

이곳에 고양이밥을 놓지 마세요~

악취와 비린내로 인하여 민원이 제기

되고 있사오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XX정보 도서관


보란 듯이 나무에도 저렇게.

여기를 지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가방 속에는 사료통이 있는데 선뜻 꺼내지 못하고 지나칠 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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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다 보면, 아직도 사람들은 멈춰 서서 얘들을 한참씩 쓰다듬어 주곤 하던데. 며칠 전엔 어떤 남자분이 한 마리를 계속 쓰다듬는 걸 보고는, 지나던 아주머니가 감탄했다. "얘들은 사람 손을 탔나 보네?"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사람들이랑 잘 어울려 지내다 지금은 저런 공지가 붙어 사료를 주고 싶어도 눈치가 보인다고.

그랬더니 아주머니가 그랬다. "그냥 줘요. 우리 아파트도 주지 말라 하는데 난 그냥 줘. 밥그릇에 보이게 담지 말고 그냥 쏟아줘요."



내가 사는 아파트도 엘리베이터에 공지가 붙긴 했지만, 길냥이들 밥을 아예 주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차를 뺄 때 사고 등의 위험이 있으니 주차장에서는 주지 말라고만 했다.

경비실 바로 옆에는 그릇들이 있어 어떤 분이 늘 챙기고, 경비 아저씨들도 화단에서 고양이들을 쫓거나 하지 않는다.


이후 살짝씩, 도서관 화단 냥이들에게 눈에 잘 안 띄는 위치에 사료를 흘려주곤 한다. 그리고는 돌아서 가면서 또 걱정한다. 애들이 미움받으면 어쩌나? 잘 먹던 걸 못 얻어먹게 되면 어쩌나.......

그리고 왜 나는 이런 걱정을 해야 하나를 생각하면 또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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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

턱의 종양이 자라나 무거워지면서 모리가 점프를 이전처럼 할 수 없게 되었다.

의자에 뛰어오르려면 이케아 발판으로 먼저 뛰어올라 의자로 건너갔었는데, 이케아 발판에도 단숨에 올라 가지지 않았다. 근 2주 사이에 이렇게 되었다.

좀 더 낮은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5. 9.

상황이 안 좋으면 면 먹는 거라도 일단 잘 먹자는 심정으로 이거저거 먹었다.

근심이 한가득, 스트레스가 한 다발이다.

요새 걸을 때 무릎이 무겁고 아픈 게 어쩌면 스트레스의 하중인지도 모르겠다.

2주에 한 번씩 동물 병원에 다녀올 때면, 이번엔 또 무얼로 마음이 더 주저앉게 될까, 마음의 준비를 한다.


이번에 들은 이야기는, 어떤 수치의 변화, 무엇무엇이 악화되고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애초에 모리의 목 옆에 구멍을 뚫은 건, 어떤 경우에 처해도 최소한 먹을 수는 있게 하려 함이었다. 못 먹어 죽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그 부분이 지금 흔들리고 있다.

관의 설치가 최후의 최소한을 담보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여기에도 위험이 도사려 있었다. 어떤 요인에 의해서건 그, 몸 안 깊숙이 박아 위장으로 연결해놓은 튜브 관이 빠질 수도 있는 거였다.


실제로 모리의 튜브가 좀 밀려 나온 지 일주일가량 된다. 완전히 빠져버리지 않게끔 조심 조심을 해야 한다. 이게 빠지게 되면 원칙상 바로 재시술을 할 수 없이 며칠은 기다려야 한다. 그 며칠 사이에는 먹이를 공급할 방법이 없다. 그래 지금 상황에선 한 번 먹일 때마다 튜브를 함부로 건드리지 않으려 많이 긴장되고 조심스럽다.

먹이지 않는 모든 순간에도 조마조마하다. 냥이 자신이 마구 긁어 제거해 버리는 경우도 생겨날 수 있는 거라. 이게 지금 모리의 생명줄이 되어있다.

한편 이 상황 말고도 종양의 여파로 폐수가 차 있기도 하다.




여태까지 상황의 변화들을 겪어내면서, 무슨 상황이 오건 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여가며, 모리가 악화되어가는 그다음 그다음 단계를 같이 거쳐 왔는데, 지금의 이 변화에 적응하느라 내 몸이 아프다. 가장 힘든 구간으로 들어온 것 같다.

이게 하루 이틀 겪어내고 마는 게 아니라, 뭐가 어찌 될지 모르는 상태를 며칠 몇 주 몇 달, 다 맡기고 따라가는 과정이라, 때로 피가 마른다.




5. 18.

이제 모리는 내 방에 거의 오지 않는다. 몸이 점점 힘들어지면서, 베란다에 놓은 고양이 화장실 옆에 앉아 있다. 거기에 깔개를 깔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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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를 핥아주는 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