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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doseeker May 16. 2022

다시 산티아고로 - 에필로그

걷기를 위한 걷기



에필로그


버스는 한 시간 만에 내가 마지막 이틀 동안 걸어온 거리를 달려 산티아고 공항에 도착했다. 도시 외곽을 지나,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하루 전 머물렀던 라바코야를 들러 공항까지 가는 동안 이제 곧 산티아고에 도착할 예정으로 보이는 순례자들의 걷는 모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나는 속으로 그들을 몹시 질투했다. 이제 몇 시간 뒤면 그들이 느낄 강력한 환희와 충만, 벅찬 감격을.




15  나의  발이 되어 주었던 등산 스틱은 비행기 반입이 어려워서 어제 만난 소영 작가님에게 기부했고,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물병이 달린 힙색도, 무릎 보호대와 장갑, 카메라도 모두  갈무리해서 가방 속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다. 그렇게 홀가분한 차림으로 가방만 달랑 메고 숙소를 나와 대성당을 지나가는 기분이 무척 생경했다. 공항에 가는 동안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문득 걷는 내내 결국  번도 꺼낼 일이 없었던, 가방 가장 깊숙한 곳에 처박혀 있는 판초우의의 쓸모가 아쉽게 느껴졌다. 그래도 지난 순례길 내내 빗속에서 길을 걸었던 일을 생각하면, 어쩌면 까미노가 이번에는 내게 일부러 구름   없는 멋진 날씨를 선물해준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 아래로 스쳐가는 지상의 풍경 속에,  위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짙은 연무 같은 안갯속을 깜깜이 헤매며 가방과 머리카락이 흠뻑 젖어가며 피레네를 넘던 ,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 고소한 또르띠야와 함께 진한 카페 콘레체를 마시는 , 연녹빛 나뭇잎과 투명한 햇살이 숲길 위에 만들어내 흔들거리는 수많은 빛의 모자이크 위를 걷는 , 어느 오래된 동화의  장면처럼 민들레 홀씨가 함박눈처럼 흩날리는 꿈결 같았던  , 흐른 땀의 소금기가 눈을 시리게  정도로 고된 산행 끝에 불어온 산들바람에 잠시 눈을 감는 ,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땀방울 자국을 남기며 걷던  마시는 콜라, 그루터기에 아무렇게 앉아 신발과 가방을 벗고 지나치는 사람들과 웃으며 안부를 나누는 , 멀리 보이는 마을의 종탑이 고향처럼 반가웠던 순간, 녹초가 되어 도착한 알베르게의 서늘하고 친숙한  공기가 피부에 닿는 감각, 그날의 걷기를 마치고 나른한 오후의 시에스타, 알베르게의 테라스에 비치는 늦은 오후의 부드럽고 포근했던 햇살 속에서 나를 위한 글쓰기와 드로잉을 하는 , 풀벌레 소리만 나직이 들리는 가운데 새벽 별을 바라보며 홀로 걷는 , 아무도 없는 깊은 숲 속에서 이유도 모른 채  태어난 아이처럼 철없이 울음을 흘리는 , 모든 고통을 환희로 잊고 마침내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  



한국이 아닌 파리의 시떼 데자르 스튜디오로 돌아오는 기분은 묘했다.  시간 남짓 비행으로 파리에 도착했고, 공항에서 작업실까지 오는 길에 장을  왔는데도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하루 종일 걸어야 간신히 목적지에 닿았던 나날을 보내서인지, 파리에 이렇게 간단히 돌아왔다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 나지 않았다. 파리는 떠나오기 전보다 기온이 올랐고, 모두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거리와 카페에서 화창한 일요일을 즐기는 가운데  홀로 먼지 투성이 등산화를 신고 꾀제제한 옷차림으로 여전히 가리비가 매달려 달랑거리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길을 걷고 있었다.  






시떼에 돌아와 케케묵은 작업실의 공기를 환기시키고, 쓸고, 걸레질까지 마치고, 씻고, 저녁을 해 먹고 나서도 여전히 길 위의 꿈속에서 유영하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러는 동시에 당장 오늘 오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대성당 광장을 산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이미 먼 옛날의 추억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도 함께 느꼈다.  


  시간이면   킬로미터 이상을 이동할  있는 문명의 이동수단을  제쳐두고, 목적한 장소까지 무거운 짐과 함께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 고행을 하루 종일 자처했던 지난 15일은,  2 남짓 되는 날들이 마치 15주처럼 느껴지게 할 만큼 그동안 내가 얼마나 시간을 소모하는 데에만 집착했는지를 깨닫게 했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원초적인 육체의 움직임에 집중하며, 작가로서 살아온 시간을 되짚고, 작가로서 살아갈 시간을 고민했다. 어렵게 마련한 소중한 시간이었기에, 온전한 사유의 흐름에 집중하고 싶어 일부러 걷는 동안에는 가능하면 동행을 만들려 애쓰지 않았고, 대부분 혼자서 길을 걸었다.





온갖 마라톤을 섭렵해 '달리는 소설가'로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집필 작업을 육체노동이라고 정의하며, 그 작업을 제대로 하기 위해 서른세 살에 달리기를 시작했고, 달리기를 통해 장편 소설을 쓰기 위한 지구력과 집중력을 길렀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달리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나에게 있어서는 글쓰기) 메타포(비유)이기도 하다.”


산적한 일들을 미루거나 내팽개친 채로 내가 파리로 떠나온 이유, 그리고 파리에서 다시 순례길로 떠나 얻고자 했던 것들 중 하나가 이것이지 않았을까. 비단 예술의 영역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일에 대한 결과는 스스로를 연소시킨 결과물로써 산출된다. 오직 문제는 그 '연소'가 어떻게, 어떤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느냐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5일은 일정한 목표를 향한 꾸준한 걷기를 통해 스스로를 소모시키는 것이 아닌, 효과적인 연소의 과정을 다시금 느리고 확실하게 체득했던 시간이었다.

마라톤 마니아인 하루키는 자신이 죽게 된다면 묘비에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고 쓰겠다 했지만, 무릎 연골을 걱정하는 나의 경우에는, '적어도 끝까지 걸었다'라고 쓰고 싶다. 언제까지고 멀리 걷기 위한 걷기를 계속하고 싶다. 순례길이 산티아고에서 끝나지 않듯, 나의 걷기 또한 마침내  끝을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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