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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지 Jun 16. 2023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평가절하와 천재 사이에서 스스로를 박제하는 INFJ 들에게

결론부터 말하면 이직에 성공했다. 이직을 생각하고 사람인에 이력서를 공개해 놓은지 2년 째의 일이다. 왜 그렇게 오래걸렸느냐하면 2년 전부터 필요성은 느꼈으나 절실함이 없어 이력서의 항목을 다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올해 초였나, 어떤 계기로 갑자기 이직을 해야겠다는 강한 필요성을 느꼈다.


그게 뭐였냐면 혈뇨였다. 긴급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갑자기 요도가 작열하면서 피가 나온 것이다. 이건 좀 심각한 상황인 것 같은데? 싶었는데 이런 일이 두 세번 반복되었다. 동일하게 특정인을 대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인 거 보면 나는 이 상황을 피할 필요가 있었다.


밤 9시에 갑자기 집 앞에 있는 셀프 사진 스튜디오를 예약했다.


10시에 머리를 감고 화장을 하고 그 스튜디오로 달려가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까지 사진을 찍었다. 셀프 스튜디오라서 그냥 내 모습을 내가 자유롭게 촬영할 수 있었고, 나는 이제 신입사원의 증명사진을 벗어던지고 조금은 여유로운 대리과장급의 얼굴을 하고 사진을 인화했다.



이 사진으로 이력서란을 업데이트했다. 거의 들어오지 않던 JD들이 꽤 많이 쏟아졌다. 내실있는 곳은 없었다.


원래는 유통쪽으로 이직할 생각이었고, 현재 기업보다 작은 규모는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갈만한 곳이 적었다. 백화점, 면세점, 홈쇼핑, 오픈마켓 그정도. 혹은 콘텐츠 쪽으로 이직하게 된다면 네이버, 카카오, 리디 같은 회사들이었으나 내가 원하는 포지션이 뜨지 않았다. 그보다 작은 규모의 스타트업도 두드려보았으나 연차가 너무 높아선지 실력이 부족해선지 번번히 낙방이었다.


나는 되게 우연한 운이 있는 편이다.


하지만 준비된 사람만이 운을 차지할 수 있기에, 나는 스스로 준비된 천재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끊임없이 재단하고 평가절하하면서 동시에 누구보다도 나에 대한 자부심에 차있는 나 같은 사람 유형을 INFJ라고 한다.


그 날은 회사에서 대차게 깨지고 너무 우울해서 회의시간에 원티드를 켰다. 원래라면 생각도 안했을 엔터 업계를 검색해봤고 그대로 원터치 입사지원을 눌러봤다. 웬걸 붙어버림. 서류 합격. 그리고 1차도, 2,3차도 스무스하게 진행되어버렸다. 이 모든 게 얼떨떨했다.


행운은 넝쿨처럼 굴러왔다. 그냥 넣어본 수도권 청약에 예비당첨이 됐다. 최종 당첨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싶었다. 원래 나는 로또 5등도 못 당첨되어본 사람. 인생 통틀어서 당첨된 물건 중 가장 좋은 건 만화 잡지의 머리끈 정도였다. 일상의 운이 좋은 이유는 당첨운이 없어서라고 믿었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조물주도 유형별로 운을 분배해놔야했을테니까.


그런데다가 3시간 공부하고 본 포토샵 공인 시험 1급도 합격했다. 이건 내 노력과 능력이 들어간 거겠지만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여, 신혼여행 가는 기간동안 토트넘 홈경기가 없을까봐 걱정했는데, 홈 개막전을 딱 보는 일정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얼마나 운 좋은 일주일인가.


바닥을 쳤던 자존감이 올라왔다. 잊고 있었던 행복감이 돌아왔다. 멍텅구리 취급을 당하고 살았지만 나 사실은 천재였을지도 몰라. 내 안에서는 아무리 해도 증명되지 않았던 것들이 이직성공, 자격증 합격, 청약 당첨 등으로 객관화되자 나는 '살아있다'는 감각을 크게 느꼈다. 그러면서 또 그런 자만심이 머리를 드는 것이다. 나 혹시 멍청이로 잘못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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