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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Jun 04. 2023

핏줄을 통과할 때 책은 비로소 존재한다

 두어 달 만에 드디어 책 한 권을 끝냈다. 아, 오해 마시길. 책을 집필한 게 아니라 책 한 권 읽는 걸 끝낸 것이다. 놀랍게도 그렇다.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습관과 한 권 한 권이 읽기 쉬운 책이 아니라는 것을 핑계 삼아 보지만, 결국 하루 중 책 읽는 시간이 찔끔찔끔인 게 가장 큰 요인이다. 또 머리가 복잡할 때는 며칠이고 책 근처도 가지 않는 일이 수시로 생기는 요즘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항상 이렇게 몇 쪽씩 찔끔거리니 글의 맥락이 잘 안 잡히는 게 또 문제인지라 글의 흐름을 잡고 몰입하는데 또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한 권의 책을 끝냈을 때의 뿌듯함은 그만큼 남다르다.


 이번에 찔끔거리며 완결한 책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이다. 처음 sns를 통해서 좋았다는 말에 혹해서 충동구매를 했다. 하지만 몇 장 넘긴 후 나는 약간의 실망감을 느꼈다.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이 책을 샀을까 하는 후회가 잠시 밀려왔다. 읽기를 중단할까 하는 고민 속에서 그래도 며칠에 한 챕터씩 마지못해 억지로 밀고 나간 결과, 책 중반부에 이르러서야 작가의 의지와 의도가 내 실핏줄을 따라 올라오기 시작했고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내 심장과 뇌를 통과하며 마무리되었다.  그러니 힘들고 재미없었던 전반부를 견뎌낸 나의 시간에 대한 보상이 갑절로 느껴지는 것이다.


 책의 작가는 생물 분류학적으로 맨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사실은 얼마나 하찮은지, 그 하찮은 인간이 분류하고 규정한 생태계와 과학이 얼마나 무지하고 자기중심적인 것인지를 말한다. 그래서, 교만한 인간의 기준으로 세상의 생명들을, 심지어 인간을 분류하는 우매함을 저지르는 것을 비판한다. 바다에 산다는 이유로 물고기라는 분류 기준 아래에 각종 생물들이 분류되지만, 사실상 그들은 물고기라는 범주로 일원화할 수 없는 각기 다른 생명의 기원을 가진 것이었다. 인간이 만든 물고기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 질서를 무너뜨리면 인간이 우주의 먼지와 같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이 특별하다는 이유로 여러 질서를 만들었다. 그 질서의 편견 아래에서 많은 자연과 인간이 당연하게 취급받아왔다. 인간이 아무리 그것이 자연의 질서인 것처럼 생물들과 스스로를 과학의 그물에 사로잡지만, 그래도 결국 물고기는 그물 안에서만 존재할 뿐, 바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갈수록 책 읽기가 어렵다. 우리 집에는 많은 책들이 아직 읽히지 않은 채 존재한다. 하지만 내가 책을 읽지 않는 한,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그 책을 읽고 내 혈관을 타고 작가의 의지가 들어오는 순간 책은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지만 이 책은 내게 존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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