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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May 25. 2024

종말의 바보로 사는 법

  재미없다는 말을 듣고도 심심한 주말을 보내기 위해 굳이 선택한 넷플릭스 드라마 '종말의 바보'.


  역시 남들이 예스할 때 노하고, 노할 때 예스하는 고독한 감성인답게 나는 이 시리즈가 제법 볼만하였다. 물론 시나리오나 극의 흐름이 썩 좋았던 것은 아니다. 중반부에서 별 내용 없이 반복되며 늘어지는 이야기, 벌여놓은 에피소드들이 복선만 잔뜩 쌓아놓고 유야무야 넘어가거나, 용두사미가 되는 마무리들이 나의 인내심을 수시로 시험하며 12회라는 긴 회차를 계속 보기를 고민하게 하였다.  무엇보다 개봉 전 안 좋은 이슈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배우 유아인의 이야기를  최대한 덜어내면서 발생한 내용의 생략과 비약이 이러한 흐름의 끊어짐에 일조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드라마를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고 소감을 남기는 이유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과 허무함을 조금은 흔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종말을 다루는 많은 이야기가 영웅의 통쾌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거나, 소시민의 헌신과 희생으로 감동의 눈물샘을 자극하거나, 또는 인간 문명이 파괴되는 순간의 시각적 충격, 또는 파괴된 이후의 디스토피아적인 삶의 이야기로 인간문명에 대한 경종을 울리며 종말 자체에 이야기의 주제가 있다면 이 이야기의 결은 사뭇 다르다. 그저 하루하루 종말의 시간에 다가갈 수밖에 없는 시민들의 불안과 공포가 삶에 묻어날 뿐 아무도 종말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저 일을 하고 성당을 나가며 삶을 살아내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종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각자의 종말을 꾸역꾸역 살고 있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각자의 소행성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시간이 드라마처럼 200일이 아닌, 길면 2만 일 내외로 예상되기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언제라 할 수 없기에 종말을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다가 60, 70세가 넘어가면 비로소 삶을 돌아보며 종말의 생각이 뇌리를 비집고 스멀스멀 들어온다. 더 확실한 것은 질병으로 인해 시한부 선고를 받아 종말이 비로소 몇 년 안으로 특정되어 다가올 때 일 것이다. 그것이 노화로 인한 것이든, 또는 병으로 인한 것이든 우리는 그때부터 각자 종말의 바보가 되어 버린다.


  나는 어떤 종말의 바보가 될까? 극 중 주인공 세경이나 윤상처럼 안전 지역으로 탈출할 기회가 있음에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씩씩하게 살아가는 바보가 될까? 신부인 성재처럼 믿었던 사람의 배신 또는 신념에 대한 혼돈으로 좌절하지만 끝내 배신한 사람과 자신의 신념을 지켜내는 바보가 될까? 군인인 인아나 부시장처럼 자신만 살고자 탈출하는 상관들과 달리 끝까지 자신의 직무를 묵묵히 해내는 바보가 될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야기 속 수많은 인물들처럼 자신 또는 자기 가족만 살아남으려고 모든 권력과 온 재산 심지어 영혼마저 바치고 온갖 유언비어라도 믿어보려 발버둥 치는 바보가 될 수도 혹은 또 다른 인물들처럼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쾌락과 욕망 속에 나 자신을 빠뜨려 버리는 바보가 될 가능성도 크다.


  그날이 왔을 때를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해 본들 막상 닥쳤을 때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그저 거대한 우주의 코스모스 속에서 찰나의 한 점이라는 사실을 끝내 인정하면서도 나만의 코스모스도 그에 못지 않은 영원이 있음을 긍정하며 몇천 일 또는 그보다 적거나 많을 종말의 하루인 오늘을 뜨겁게 또는 따뜻하게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의미있는 바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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