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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고래의 흼을 찾아서

번역과 리뷰의 통증은 비슷하다

by 연구하는 실천가

나는 독서를 좋아하지만, 그 책이 번역본인지 아닌지는 굳이 생각해 본 적이 잘 없다. 읽다가 이해가 어려우면 그제야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 확인해 보고 번역본이라는 것을 깨닫는 무개념 잡학독서의 대가인 셈이다.


그런데, <흰고래의 흼에 대하여>는 내게 그런 투명인간 같은 존재인 번역가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자기 고민과 원작 또는 다른 번역가, 심지어 ai와의 투쟁을 하는지를 심도 깊게, 그리고 재밌게 써 놓은 책이다.


처음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sns에서 누군가 추천해 놓은 것을 무심코 내 독서앱에 저장해 두었다가 학교에서 책 구입 추천이 들어와서 별 생각 없이 신청해서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책이 번역과 관련된 책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처음 읽으면서 내가 생각한 내용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에 일차 당황했고, 내용이 쉽지 않다는 점에 이차 당황을 했다. 그래서 나는 10여 쪽을 읽은 상태에서 계속 읽을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하지만 내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책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힘겹게 읽다가 점차 빠져드는 책들이 많았기에 초중반의 힘겨움을 이겨내고 완독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중간 중간의 여러 에피소드들이 다소 딱딱한 이야기의 시원한 소나기역할을 해서 끝까지 흥미로웠다)


이 책을 읽고 첫 번째 놀라웠던 점은, '번역가가 이렇게 글을 잘 쓰다니'였다. 많은 에세이를 읽었지만, 이렇게 다양한 비유와 신선한 표현력, 과거의 여러 이야기들을 흥미롭고 감각적으로 써 내려간 문체는 나를 감탄하게 하고, 질투 나게 하였다.

두 번째는 번역이라는 것이 이렇게 치열한 자기 성찰과 고민의 투쟁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이 주는 놀라운 매력이다. 나는 번역이란 그저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영어시간에 하던 것처럼 영문을 자연스럽게 국문으로 해석하는 것 정도로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에 의하면 번역은 그야말로 하나의 예술 행위였다. 원문을 그대로 드러내는 번역을 해야 할지(직역), 독자의 이해도를 위한 자연스러운 문체와 문장으로 바꾸어야 할지(의역)에 대한 자신과의 싸움이자, 문화적 사회적 압력과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야 하는, 주변 문화와의 패권 싸움이기도 했다. 결국 이런 고민을 하는 좋은 번역가는 작가 못지않게 글을 잘 쓸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 번째, 번역의 철학적 논쟁이 정말 재미있었다. 고대 바벨탑에 대한 신의 징벌로 인해, 세상의 언어가 구분되어 나오면서 번역의 역사는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부터 이제 ai로 번역하는 시대가 오면서 다시 바벨탑의 시대처럼 우리는 세상의 언어가 다시 하나가 되듯 쉽게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것까지. 그러면 번역가의 시대는 앞으로 끝이 나는가?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번역가의 번역은 ai의 번역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작가의 침묵을 읽는 것, 단어 대 단어가 아니라, 독자들의 언어에 맞추어 가장 알맞은 단어나 문장을 선택하는 것은 오직 번역가의 치열한 고민을 거친 번역 언어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먼 미래에는 모르겠지만, 가까운 미래까지는 나도 작가의 말에 동의한다.


책을 읽기만 하다가, 읽은 책의 내용이 바로 휘발되는 것에 책 읽는 일이 허무해지는 것때문에 요즘 나는 계속 리뷰를 쓰고 있다. 생각해 보면 리뷰도 번역과 비슷한 면이 있지 않을까? 흰고래(번역의 의미)를 찾아가기 위해 고대에서 현대까지 많은 이야기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작가의 말처럼, 리뷰를 쓰는 일도 책 내용만 요약해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책 내용을 가만히 떠올려 보면, 작가의 침묵과 호흡이 느껴지고 작가의 속삭임이 작게 들린다. 물론 그것은 오로지 나에게만 하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나는 하얀 모니터에 까만 글씨로 가만히 옮긴다. 그러면 깜깜하던 책 내용이 조금씩 하얗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 또한 리뷰를 쓰며 작가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게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리뷰이다. 그러다 보면 멀리서 작은 흰고래 한 마리가 일렁이는 내 마음에 들어와 헤엄을 친다. 그렇게 내 가슴에서 오랫동안 놀다가 조용히 바다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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