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지 Mar 24. 2024

봄 아지랑이 속을 뚜벅뚜벅 걸으며

일상의 고민도 하나씩 던져버린다

빨강, 파랑, 회색, 분홍, 검정...

다채로운 색상으로 옷이며 신발이며 양말이며 모자로 둘러싸인 사람들. 그들은 내 앞을 앞질러도 가고 마주보오고 또 저멀리 달려간다. 오늘은 강아지들도 많이 나왔다. 표정도 유난히 밝다. 갈색의 불거리는 털의 푸들. 윤기나는 회색빛 허스키. 하얀털에 까만 눈망울의 말티즈까지. 요즘 조금은 복잡해진 무채색의 내 마음과는 묘하게 대조되는 풍경 나는 한참을 눈을 떼지 못했다.


조그만. 

호수를 둘러싼 폭 2미터 남짓의 산책길. 

사람들 동물들 그리고 꽃을 터트릴 준비를 마친 통통한 새순들이 오밀조밀 매달린 가로수들로 어느때보다 북적거렸다. 나는 호기심 많은 여행자처럼 신기한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관람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 순간 봄날의 산책로가 선사하는 활기참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나는 다시금 가슴 깊숙한 곳에서 느낄수 있었다. 그리고 그걸 몹시도 그리워한 내면 깊은 곳움츠러든 내모습도 함께.


정말 오랜만이다!(봄이 와서 그런것도 분명! 있겠지만)

호수 산책길을 마지막으로 찾은게 언제였는지. 몇년전 출간을 준비하면서 매주 글쓰기 주제고민하고 있을 때. 나는 하루가 멀다하고 이곳을 찾았다. 요즘은 조정(rowing)연습 시작되고 학교 개강까지 겹치면서 이곳 까지 따로 시간을 내서 산책을 할 여유도 의지도 없었다. 다행히 이번주는 토요일 수업이 휴강하면서 어제 조정 다녀왔고 오늘은 미술관을  갈까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이곳으발길을 돌렸다. 뭐 그래도 중요한 건 뭐다? 어쨌든 여길 내 두발로 다시 찾은 것. 그것도 봄의 향기가 막 터질듯말듯 한창 올라간 바로 그 순간에 내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오랜만에.

여기를 찾았어도 예전 좋았던 감정금새 되살아났다. 꼭 오랫동안 못보았지만 막상 만나면 매일 보는 사람처럼 편안한 고향친구같은 느낌.  만나는  횟수보다  인연 자체로 나를 기분좋게 만드는 것. 바로 이 공간이 내게 가진 의미다. 그사이 부쩍 늘어난 조깅하는 사람들.(여기서 조깅이 아닌 조정도 할 수 있음 얼마나 좋을까) 바로 옆 호수의 고요함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겠다는 의지로 힘차게 두 발로 내달린다. 그 모습에 나도 순간 달려볼까 움찔해본다. 하지만 걷기가 주는 기쁨을 애써 상기하면서(걷는 보폭에 생각의 리듬을 맞추는 재미!) 이내 마음을 접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산책길 중간.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충분히 근사한 풍경화 한폭이 늘 나를 반겨주 전망대가 하나 있다. 프라이부르크 전망대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독일을 한번도 가본적은 없지만 그래도 독일도시의 이름을 딴 그곳에서 바라본 호수의 모습은 괜시리 이국적이면서 평화로움까지 느껴졌. 산책길 옆으로 쭉 늘어선 연두빛깔 나무들이 호수표면에 그대로 반사되면서 수채화 한폭이 완성된다  그렇다. 이런게 바로 내가 호수 산책을 좋아하는 이유다. 예전 이곳에서의 산책이 내게 주었던 가슴 뭉클한 감정이 바로 이런것이다! 나는 왜 그렇게 까맣게 잊고있었을까. 아니 애써 억누르고 있었던걸까.


최근.

학교를 가기위해 일주일에 몇번씩 이 호수옆을 지나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의식적으로 호수방향 외면했다. 아니 근사했던 기억을 일부러 꾹꾹 마음 한켠에다 눌러두었다. 딱딱한 전공책, 논문들과 씨름하면서 조직에서 신생팀이기에 풀어야하는 과제들을  떠안고 있는 상황이 지리하게 반복되고 있는 요즘. 그래서 호수를 걸으면 느끼는 이런류의 편안함은 왠지 사치스러운 감정처럼 느껴졌. 몇년전 내 인생을 바꾸는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던 바로 그때.  꽤나 오랜시간 곁에서 나의 일상을 포근하게 감싸주었공간이었는데. 이유를 굳이 찾아보자면 최근 어느때보다 팍팍한 일상에서 뭔가 편안함보다는 결기 비슷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느꼈나보다. 누가? 바로 얼마전의 내가 그랬다.


 하지만.

오늘 다시 찾은 호수의 산책길 위에서. 나는 예전의 감정이 그대로 내안에 꿈틀꿈틀 살아있음을 느꼈다. 진작에 자주 데려올껄. 후회가 살짝 들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더 자주 더 길게 이곳을 찾아야겠다 결심했다. 새로운 일상이라고 해도 나란 사람을 갑자기 바꿀수는 없기에. 있는그대로 나를 인정하고 조금이나마 편하게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의식적으로 가져보자.  자체로 살기위해 더 치열하게 노력하기로. 도대체 이런 결심을 겨우 3월밖에 안되었는데 올해만 몇번째인지. 그럼에도 필요하면 더 자주 더 많이 해야한다. 중요한건 나의 일상을 충분히 즐기며 온전히 로 살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멋드러지게.

늘어진 버드나무 한그루 아침 햇살을 배경으로 꼿꼿하게 서있다.  겨울을 견뎌내고 이제 봄을 맞이하는 여유까지 풍긴.

일터와 일상에서. 

요즘 나를 꽤나 흔들어대크고작은 고민과 문제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머릿속을 등둥 떠다닌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호수로 냅다 던져버렸다!그렇게 호수를 빙글빙글 나는 걷고 또 걷는다.


문득.

내가 던져버린 것들을 전부 품고도 뭔가 아쉬운지 호수의 따스 시선이 등뒤에서 느껴졌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었다. '다음에 또 올텐데, 늘 그 모습 그대로만 있어주길'


평생에 걸쳐 매일 매시간 그 자신 자체일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할 게 없다 -쇼펜하우어-


매거진의 이전글 시간과의 이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