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클로에 Nov 28. 2019

스타트업에 간 신입 디자이너

시작을 스타트업으로 고민하는 당신에게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고 한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 같을 때가 있고, 어른이 되고 책임질 것들이 늘면서 어른의 모습을 갖추는 것처럼. 당장에 거창한 의미를 찾지 않더라도 게임만 보아도 그렇다. 1 레벨 짜리 초보자는 작고 귀여운 몬스터들을 잡고 잔심부름을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거대하고 불을 뿜는 몬스터들과 마주하게 되고, 나중에는 혼자가 아니라 파티를 맺어 보스를 사냥하러 가지 않는가.


답이 없고 객관적 평가 형태로 존재하기 어려운 게 디자인이라지만, 그래도 나름의 레벨 체계는 있기 마련이다. 내게는 기본적인 인식을 뜯어고치느라 무척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는 디자인 씽킹이나 디자인 프로세스가 그랬고, 그 이후 반복적인 작업들과 피드백으로 시각보정의 레벨도 차츰 높아졌다. 나름 학부생 레벨 4까지 달성하고 '하하 이제 완전 초보는 아니지 않을까!' 하고 졸업했더니 엄청나게 큰 던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첫 사회이자, 스타트업이었다.


이전 글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졸업하고 스타트업 면접을 보는 그 순간까지 디자이너를 할 생각이 1도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 인하우스, 에이전시, 스타트업 같은 디자이너 취직 전선에 있는 용어들을 하나도 알지 못했다. 당연스럽게도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고 각각이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내게 취직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돈을 버는 일종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2018년 1월 2일 첫 출근을 했다.


내가 생각했던 커리어우먼이나 멋진 회사의 이미지와는 다소 달랐다. 작다면 작은 사무실, 임원과 수석님과 개발자와 디자이너 모두 한 공간에 파티션도 없이 머물렀다. 당시를 회상해보면 총인원이 10명도 채 안되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알바 구인공고에서 보이는 '가족 같은 분위기' 마냥 매일 점심을 함께 먹었고 커피타임도 함께 했다. 다행히 내가 오기 전에 디자인 업무를 겸하던 실무자가 있어서 그 사람에게 업무 내용들을 안내받고, 작은 일들을 했다. 문서에 필요한 에셋을 만들거나, 아이콘을 제작하는 일 등이었다. 크게 무리가 가지 않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디자이너의 업무가 점점 많아졌다. 제출해야 하는 문서는 마지막에 반드시 디자이너의 손을 거쳐야 했고, 제공해야 하는 서비스의 웹 화면 리디자인 프로젝트가 생겨나고 와중에 정리되어있지 않은 CI 정리나 사내에 필요한 현판 등도 주문해야 했다. 회사가 점점 커지면서 어느 날 갑자기 디자인 팀이 생기고 그 안에서의 조직 구성이 필요해지기도 했다. 서로의 R&R 을 알지 못해 혼란스러웠고 와중에 마감해야 하는 일들은 꾸준히 있었으며 한 치 앞도 모르는 안개길이 그저 낭떠러지가 아님을 바라며 걸어야 했다.


그렇다. 레벨 4짜리가 올 곳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단언한다. 스타트업은 레벨 4짜리가 갈 던전이 아니다. 이건 내가 몸소 있어보며 깨달은 것이었다. 이 던전은 레벨 3 이상부터 입장 가능합니다.라고 쓰여 있었지만 사실 그 안에 찐 보스는 레벨 30쯤 되는 놈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입사 1년 동안 맨땅에 헤딩과 무수한 혼란 속에서 깨달았다. 마치 던전 속에 들어간 새싹 유저가 수십 번 죽고 부활을 반복하며 겨우겨우 레벨 30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는 느낌과 비슷하다.(이 문장에서 포인트는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상대하는 것이다. 눈물...)


그 과정을 통해 배운 것도 많다. 첫째로는 내가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는 것.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자유는 달콤하지만 그만큼 내가 배우는 것 또한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행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업무를 할 수 없었고, 자꾸만 변화하는 회사의 상황과 내 역할에 몰두할 수가 없었다. 스타트업에서의 업무는 굉장히 산발적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들에 최고는 아니더라도 이리저리 공부하고 알아가며 적당히 맞출 수 있는 적극성이 필요했다.


둘째로는 미래를 조금 계획하며 살아야겠다는 것. 이는 곧 커리어를 설계해야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어렵게 생각하기보다 '나는 디자인 분야 중에서도 어떤 분야를 더 좋아하네, 관심 있어하네'정도는 알고 있는 게 좋은 것 같다. 흘러가는 대로 오다 보니 내가 원하지 않은 것을 쥐고 아등바등할 때가 많았고 그런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디자이너 직군에도 많은 분야가 있고 어느 정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업무는 무엇인지', '나는 후에 어떤 디자이너로 나아가고 싶은지' 정도는 분명히 해야 함을 느꼈다.


세 번째, 어떠한 경험이든 배움이 된다는 것. 삶의 모토와 비슷한 것이긴 했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더욱 많이 느꼈다. 맨땅에 헤딩하며 괴로워하는 것도, 격한 환경들도 모두 내게 도움이 되었다. (당시에는 엄청난 스트레스였지만) 괴로워했던 마음들은 다른 팀원분들은 '나 같은 고생을 겪지 않았으면...'하는 마음이 되어 매니징에 더욱 신경 쓰게 되었고, 격한 환경들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제 더 이상 오늘까지 해주세요 하는 일들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일단 차근히 시작하는 마음을 가지게 해 주었다. (좋은 거... 맞겠지?)




모든 것엔 때가 있지만 모든 것을 내가 선택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는 과정이 그러하고 때로 운 좋게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그중에 내가 고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고른 것들이 결과가 되어 또 나의 일부가 되고 그로 인해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또 생기게 되겠지.


회사일을 하면서, 후에 도움이 필요해 참석한 디자이너 모임이나 커뮤니티를 통해 알게 되었다. 스타트업은 신입이 가는 게 아니란다. 겪어보니 맞는 말 같다. 약간 부모님이 자식들이 꽃길만 걷길 바라는 것처럼, 신입들이 너무 부딪히며 배우기엔 너무 격한 환경이다. 나라도 신입이 스타트업 간다 하면 괜찮은 회사인지, 돌다리라도 두드려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어느 누구의 물음에도 '아 무조건 신입은 인하우스! 에이전시!'를 외치고 싶지는 않다. 누구나 가진 성향이 모두 다르고, 또 누군가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하면서 스타트업을 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창업 역시 마찬가지고. 짤막하게나마 신입으로 스타트업을 겪어보면서 느낀 점들을 적은 이 글이 스타트업을 가려는 신입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각자에게 주어지거나 선택한 길을 모두 응원한다. 늘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믿으며.




번외.

스타트업 2년을 겪고 내가 생각하는 '이런 신입은 스타트업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의 특성 목록

(고생 안 한다는 뜻은 아니다. 고생하더라도 비교적 잘 버틸 수 있을 거란 뜻이다. 파이팅..!)


1.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 스타트업에서의 생활은 매일매일이 새롭다. 사업계획서 좀 만들어주세요. 네?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코딩 한번 해보실래요? 하는 일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다 잘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시도해보고 영 아니면 아니라고 해도 된다.)


2. 배움을 좋아하고 배우는 것에 두려움이 적다.

- 일당백을 해야 하는 스타트업의 특성상 이것저것 배울 것도 많다. 지금은 많이 까먹었지만, html/css 도 겸했던 때가 있었다. (와중에 같이 해보자며 vue.js 도 잠깐 맛봤다. 자바스크립트는... 정말 이해가 안 됐다.) 디자인 안에서도 이리저리 배울 것이 참 많다. 실무를 해야 하는데 모르면 진행이 안되고 그럼 공부하는 수 밖엔...


3. 주어진 일보다 많은 일들을 하며 성취를 느낀다.

- 일하는 건 힘들지만 막상 해놓은 것들을 보면 아 나 참 열심히 했구먼 하고 뿌듯해진다. 나의 경우 새로운 일들을 마무리 지을 때마다 어떻게든 해냈다는 성취감이 들었다. 단, 일을 끝맺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일들을 시작하진 말자. 하는 나도 부담이고 지켜보는 사람들도 힘들다.


4.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넓은 디자인 바운더리를 맛보고 경험하고 싶다.

- 이 요구에는 스타트업만 한 곳도 없는 것 같다. UXUI 디자이너로 들어왔지만 브로셔 같은 편집도 해볼 수 있고, 오프라인 행사 준비도 해볼 수 있고... 세상엔 많은 종류의 디자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더불어 한없이 겸손해지게 된다. 세상은 넓고 디자이너는 많다.


5.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를 주체적으로 개선해나갈 수 있다.

- 가끔 멍하니 시간이 뜰 때가 있다. 그럴 때 요리조리 보고 부족한 것들을 알아서 채워주면 굉장한 신뢰를 쌓을 수 있다! 경험상 이렇게 해주면 그 문제를 느끼지도 못했지만 은연중에 불편했던 분, 또는 불편한 원인을 알았지만 말은 안 했던 분들이 매우 좋아하신다. 인지하지도 못한 불편함이 사라지는 마법을 부리는 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 기회다. 



작가의 이전글 어쩌다 디자이너가 됐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