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부터 이어진 가정폭력... 살아서 30대가 되었지만
어떤 시절의 기억은 잊고 지내는 편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부정하게 되거나 모든 신경이 과거로 회귀해서 그 시간을 걷고 뛰며 헤매이는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어떤 기억들은 무의식 언저리의 창고에 처박아 놓고 꺼내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누군가 나에 대해서 물으면 그 이야기들은 하지 않거나 적당히 미화해서 혹은 친구들의 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조금 섞어 아름다운 가족의 서사를 그려낸다.
나는 내 부모를 사랑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한다. 하다가 보면 정말로 사랑하는 것 같고 정말로 이해 받고 존중 받으며 아름다운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는 기분이 종종 들때가 있다. 적당한 거리, 그 거리에서 오는 안정감과 존중감을 사랑이라고 믿으며 산다. 아니, 살았다. 살았다... 사이비 종교적인 믿음 속에서 그렇게 살려고 했지만 어쩌다 보니 실패했다. 나는 우리 가족의 실패를 믿고 싶지 않았나? 아니, 나는 우리 가족이 실패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이런 건강하지 않은 관계가 지속 되었는 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린 코끼리를 커다란 통나무에 묶어 놓고 키우면 커서도 그 나무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내 가정사를 설명하기에 이 보다 더 적합한 이야기는 없을 것 같다.
왜 내 주변에서는 불행이 끊이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종종한다. 나는 왜 사람들과 불화하며 사는 가.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 당하고도 아직도 그 사람이 죽을까봐 불안해 하면서 사는 지 종종 잘 모르겠다. 어렴풋이 알 수 있는 건 그래, 이 연재 글의 제목을 '사랑 받고 싶었다, 그 뿐이었다'라고 지으면서 조금 나를 이해하게 됐다고 하면 거짓말 같을까. 잘 모르겠다.
1. 2020년 29살의 여름.
2020년 7월, 논문 작업이 막바지였고 나는 서울로의 이사를 앞두고 있었다.
이 시절에 부모님은 내 이름으로 인터넷 요금을 사용하고 계셨다. 내 이름으로 핸드폰과 인터넷... 많은 것을 사용하고 계셨다. 뭐, 요금만 제대로 낸다면 문제가 될 게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자금 관리를 맡은 엄마는 많은 것들을 연체하며 사용했다. 이게 불만이었던 나는 오랜 시간을 들여(부모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 되니까) 이것저것 정리하는 일에는 성공했지만 인터넷 만큼은 정리가 안 된 상태였고 당시의 기록은 상기와 같이 남아 있다.
엄마가 인터넷, 핸드폰, 보험 요금을 내는 방식은... 이상했다.
인터넷과 핸드폰 요금은 당시에는 3개월 미납인 경우에 정지(요즘에는 1개월 안내도 정지로 알고 있다)가 됐는데 가령 1월에 핸드폰을 개통해서 사용하면 1월의 요금은 정지되는 3월에 낸다. 2월과 3월의 요금? 2월은 4월에, 3월은 5월에 나간다. 이런 식으로 엄마는 핸드폰과 인터넷 요금 등을 확실히 채납하면서 사용했다. 이에 대해서 부모님 명의의 것들은 그렇게 쓰든 말든 내 알바가 아니지만 내 이름으로 사용 되는 것들은 결과적으로 나에게도 연락이 오기 때문에 이것들에 대해서 엄마와 아빠에게 하지 말라고 각각 말했지만... 보았다 싶이 "하고 싶어서 하니?"가 부모의 대답이었다.
2. 초등학교 6학년, 4살 차이의 여동생과 10살 차이의 남동생
초등학교 5학년 가을이었을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니 대문이 열려 있었다. 거실 식탁에는 이모의 이름이 적힌 서류가 한 장 놓여 있었고 집안 곳곳에는 빨간색 딱지가 붙어 있었다. 나는 이모가 집에 처들어 온 줄 알았지만... 나중에 커서 알고 보니 그건 그냥, 집행관 이름이 이모와 같았을 뿐이었다. 그래, 그날 우리 집에는 빨간 딱지가 붙었다.
나는 아빠에게 전화했고 아빠는 딱지가 어디에 붙었는지 묻더니 절대로 떼지 말라고 했다. 이미 내 컴퓨터에 붙은 빨간 딱지를 내가 손톱으로 1/3즈음 제거 했던 순간이다. 왜 안되느냐고 물었지만 아빠는 한숨을 쉬었던가. 이후에는 우리 집에서 쫓겨나듯 이사를 갔고 이사를 가던 날, 집 계약이 잘 못 돼(전세로 계약했는데 월세 계약이라서 싸우신 거라고 함) 엄마는 화가 난 채로 우리를 데리고 거지 소굴 같은 비 좁은 집을 떠났다.
원래 우리가 살던 동네로 가 엄마는 해당 건물 1층에 있던 약국에 들렀다. 그때 사려고 했던 건 당시에는 몰랐지만 엄마에게 물으니 쥐약이라고 추후 알려주었다. 그래, 엄마는 우리에게 쥐약을 먹여 우리를 모두 죽인 후 본인은 자살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다만 이 순간을 엄마는 무슨 계시처럼 기억하고 있다는 게 우리 가족의 비극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 쥐약을 먹이지 않고 자식을 선택한 모정에 대한 신화.
사실은 집이 어려워 지고 있다는 걸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인가... 그 무렵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걸스카우트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엄마는 비싸다며 해양소년단과 우주소년단에 각각 입단시켰다. 나는 뭐, 재미있게 활동했지만... 그래도 걸스카우트에서 봉사활동가고 해외 연수를 가고... 그런 것들이 부러웠던 것이라 조금 불만은 가졌으나 그것을 차마 말하지 못했다.
집에서 부모님이 칼을 들고 부부싸움을 했던 것은 아마 그 시절 겨울, 나와 여동생에게 가장 시린 기억이다. 이후 남동생이 찾아 왔고 엄마는 이 아이를 낳을지 지울지 고민했다. 내게 동생이 있으면 좋을 거 같냐고 묻기에 당연하지! 너무 좋아! 라고 대답하며 초음파 사진을 보고 아기 유령 고스퍼?처럼 생겼다고 철 없이 웃다가 동생한테 귀신 이름을 붙이는 게 너무하다며 뒤지게 혼이 났다.
살해당할 고비를 넘기고... 나는... 갑작스럽게 시작된 부모의 맞벌이에 제대로 희생 당했다.
엄마는 안산 상록수역에서 서울로 통근을 시작했고 아빠는 막노동을 나갔다. 차비가 없는 날에는 부모님이 돼지 저금통 앞에서 화를 내며 누가 더 많은 교통비를 가지고 갈 것인 가를 놓고 다투었다. 그리고 나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 남동생을 픽업 하고 세탁기를 돌려 놓고 설겆이를 했다. 쌀을 씻어 밥을 지을 때 즈음이면 학원을 마치고 온 여동생이 밥 투정을 했다. 막내는 울고 둘째는 화를 내고... 나는 둘째를 때려서 조용히 시키고 막내에게는 텔레비전을 틀어줬다. 그리고 저녁을 차리고 설겆이를 하고 판타지 소설을 쓰고 앉아 있으면... 부모님이 왔다. 내가 또 하루 종일 컴퓨터만 했다며 혼내는 부모님에게 여동생은 내가 자기를 때린 일부터 일러 받쳤고 나는 몇번 맞다가 부모님 밥을 차렸다. 그리고... 엄마는 내가 한 설겆이에 마른 밥풀이 붙어 있다며 나를 때렸다. 아빠는 그런 엄마를 더는 말리지 않았다.
어느 날에는 전기가, 어느 날에는 인터넷과 텔레비전만... 그런 날에는 울다가 지쳐 막내를 데리고 가출을 했다. 이모가 준 통기타 가방 가득 막내의 귀저귀 같은 걸 잔뜩 넣고 내 옷은 몇 벌 넣지 않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집을 나가서 죽어버리려고 했지만 막내에게 못할 짓 같아 집에 돌아가면 나는... 친구의 기억에 의하면 부모는 가출한 나를 걱정한 게 아니라 둘째 밥을 차려주지 않고 나갔다며 길거리에서 내게 욕을 하고 나를 때렸다.
아무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적고 있는 지금도 잘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결심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나는 반항이 심한 아이였고 늘 공상과 상상에 빠져지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인가 부모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해 엄마아빠가 익혀주는 고기도 믿을 수 없었다. 엄마아빠가 둘이 저녁 데이트를 나간 날이면 엄마아빠가 탄 차가 전복 돼 죽어버리길 기도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신은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내가 죽는 것도, 부모가 죽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모두 살아 있고...
다시, 막장 드라마를 한 편 찍고자 한다.
주님, 제가 이러는게 싫으면 간절히 부탁할게요.
이 모든게 싫다면 저를 멈춰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