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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내 Jul 06. 2023

퀴어대명절 퀴퍼에 다녀왔어요

열기 후끈했던 핸내의 첫 퀴어퍼레이드 경험기

2023년 7월 4일 화요일, 곡성에서 핸내가

친구들에게 보내는 14번째 메일 '나로 살기로 핸내(나살핸)'


시작하며

더운 여름날, 잘 지내고 계셨나요? 2주 만에 인사드리네요. 한 주는 장례를 치르느라, 또 한 주는 무기력함에 빠져 소식을 전하지 못했어요. 미안합니다. 휴재를 알린 주에는 모하지(*친구들 초대해 함께 모내기하는 프로그램) 준비와 농번기가 겹쳐 바빴고, 와중에 할머니의 부고로 제주도에 다녀왔어요. 장례를 마치고 돌아와 일상을 회복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요. 4일 정도 무기력한 상태로 뒹굴거렸어요. 모든 행동이 의미를 잃어 의욕이 다시 살아나지 않았어요. 밥도 대충 라면과 과자로 때우고 휴대폰만 보게 됐네요. 그렇게 일요일까지 무기력함에 푸욱 잠겨있다가 새로운 마음으로 월요일을 맞이했어요. 이런 시기가 때때로 찾아오는데요. 이럴 때는 회피와 무기력의 시간을 충분히 보내고, 일기를 쓰며 마음을 다잡아요. 바쁘고 정신없는 6월을 보내 쉼의 시간이 필요했나봐요. 충전하고 다시 돌아왔으니, 오랜만에 나살핸을 써볼게요!!






퀴어와 앨라이의 대명절

(* 앨라이: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사람들)

7월의 첫 날, 서울에서 아주 뜨거운 하루를 보내고 왔어요. 처음으로 퀴어문화축제에 가보았답니다! 이번 축제 슬로건은 '피어나라 퀴어나라'였어요. 녹아내릴 것 같던 강렬한 햇살에도 이상하리만큼 지치지 않는 하루였어요. 작년에는 퀴퍼(*퀴어퍼레이드)를 가고 싶은 마음보다 타인의 시선이 더 크게 느껴져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었어요. 하지만 점점 퀴어프렌들리한 친구들이 주변에 많아지고 생각도 달라져, 이번엔 오히려 몇 달 전부터 기대하고 있었답니다. 아, 서울광장 사용 불허로 인해 이번 퀴퍼는 어떻게 되는가 걱정도 했고요. 그렇다면 지금 바로! 생생한 현장을 공유할게요~!


도착지는 을지로입구역 4번 출구, 왕십리에서 환승할 때 무지개 옷 입은 사람을 발견했어요. A친구와 저는 '혹시 퀴퍼 가는 사람?'이라고 추측하며 동질감을 느꼈어요. 을지로입구역 플랫폼에 도착했을 땐, 누가 봐도 퀴퍼에 온 듯한 사람들이 많아 설레는 마음이 커졌어요. 한편 '혐오세력을 마주쳤을 때, 과연 내 몸과 마음은 괜찮을까?' 하는 걱정도 했어요. 하지만 역에서 나오자마자 퀴퍼를 즐기는 많은 사람을 보고 걱정이 싹 가셨어요. 이번 퀴퍼 장소가 서울광장보다는 협소해서 혐오세력이 드문드문 분산되어 있었어요. (오히려 좋아,,?)

드디어! 축제의 장으로 입장했어요. 무지개 깃발이 달린 입구로 들어가 무대 앞에서 공연을 기다렸어요. 첫 공연은 가수 이랑 님. 뜨거운 날씨에 땀이 주룩 흘렀어요. 최고기온이 34도까지 올라갔다는데, 저의 불쾌지수는 전혀 높아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축제의 열기처럼 느껴졌어요. 이랑 님 노래 가사 중에 "이건 곧 당신의 일이 될 거랍니다. 이 땅에는 충격이 필요합니다"라는 가사가 인상 깊었어요. 퀴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본인 주변에 퀴어가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열어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퀴퍼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건 퀴어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고,
내 주변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곧 당신의 일, 당신 주변의 일이 될 수 있다는 게 아닐까 싶네요.


"내 안에 있는 그 노랠 찾아서
내가 살고 싶은 그 집을 찾아서
내가 사랑할 그 사람을 찾아서
내가 되고 싶은 가족을 찾아서"
- 가족을 찾아서, 이랑 -


"내 친구들은 모두 가난합니다
이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이건 곧 당신의 일이 될 거랍니다
이 땅에는 충격이 필요합니다
우린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오"
- 늑대가 나타났다, 이랑 -


부스를 쭉 둘러봤어요. 굿즈 파는 부스에 가서 몸에 붙이고 착용할 수 있는 것들을 샀어요. 그리고 성소수자 부모모임 부스에 들렀어요. 무지개 끈과 하트 스티커를 주셨어요. 저는 보지 못했지만, 성소수자 부모님들이 이번에도 프리허그를 진행했다고 하네요. 스티커를 주시며 '너에게 가는 길'이라는 영화를 홍보하셨어요. 자녀의 커밍아웃을 마주한 부모가 자녀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담은 영화예요. 처음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부모들이 부모모임에 참여하며 자녀를 더 이해하게 되고, 부모들은 서로 위로와 연대를 하게 되어요.


곡성 내려오는 버스에서 이 영화를 봤어요. 프리허그 하는 장면에서 울컥했어요. 성소수자 부모들이 자녀 뻘 되는 이들에게 프리허그를 해주는데, 안기는 이들이 눈물을 보이더라고요. 모든 부모가 자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지하고 응원하는 누군가의 부모가 있다는 것만으로 큰 위로가 되었을 것 같아요. 존재를 인정받는 소중한 경험이었을 테고요. 다시 생각해보니 앞장서서 차별과 혐오에 맞서주시는 부모님들 정말 값진 분들이군요. 


"부모님이 퀴어 축제 나와서 그런 혐오의 시선을 대하면 무서워서 다시는 애들 그런 데 나가지 말라고 할 거 같은데 사람은 그게 아니에요. 그걸 보고나면 진짜 그때부턴 또 투사가 되더라고. '이런 세상에서 애들이 살고 있단 말이야? 부모라도 싸워야지.' 그런 생각들을 다들 하는 거 같아. 그게 참 어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계산으로 안 되는 부분이죠."
- 영화 '너에게 가는 길'에서 부모 활동가'나비'의 말 -


퀴퍼에서 친구들을 여럿 만났어요. 퀴퍼 가기 몇 시간 전, 같이 가기로 한 친구가 개인사정으로 못 가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 함께 즐길 수 있었죠. 덕분에 A친구와 공연을 봤다가 B친구와 부스 구경하다가 또 C친구와 카페에서 얘기하다가, 마지막으로 D, F친구와 행진을 했어요. E와 저녁식사를 했고요. 예상치 못한 만남도 있었데요. 많은 인파 속에서 저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해준 친구들이었어요. 좋아하는 친구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어요!!!


퀴퍼를 왜 '퀴어대명절'이라고 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어요. 자주 만나기 어려운 친구들을 퀴퍼 덕에 만날 수 있었죠. 그들이 제 주변에 존재하는 것이 감사했고, 그곳에 함께 있어 기뻤어요. 덕분에 체력이 소진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신나게 즐길 수 있었네요.


(+ 추가로 퀴어대명절 관련해서 웃긴 글을 봤었는데요. 퀴퍼에서는 퀴어와 앨라이 뿐만 아니라 혐오세력과 손절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대요. 그 점이 명절 같다며, 가족이란 원래 그런 거지~! 라는 글이었어요.)


퍼레이드는 을지로에서부터 명동역, 서울광장, 종각역을 거쳐 다시 행사장으로 돌아오는 코스였어요. 저희는 혼인평등연대가 있는 3호차를 따라가려고 했는데요. 알고 보니 저희가 서 있는 곳이 가장 마지막 차인 6호차가 있는 곳이었어요. 사람들이 정말 많았어요. 가다 보니 반대시위 하는 무리들도 만날 수 있었어요. 재밌는 풍경이 벌어졌어요. 반대시위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연달아 외쳤어요. 저희도 어쩌다 하나가 되어 같이 외쳤어요. "여러분의 청춘은 고귀합니다."라고, 축복해주기도 했더라고요.^^ 혐오 발언을 내뱉긴 했으나, 그 안에서는 딱히 타격이 없었어요. 행진하는 이들이 다같이 신나게 튕겨낸 느낌이랄까?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6호차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D친구가 앞 차를 쫓아가 보고 싶다 하여, 막 달려서 5호차, 4호차, 3호차까지 갔어요. 결국 마지막엔 1호차까지 달려갔다지요. 1호차와 6호차는 출발시간이 거의 20분 넘게 차이 났는데 말이죠. 덕분에 오랜만에 달리기 했네요. 달려가는 중에 국제엠네스티의 Just Marriage 행진을 봤어요. 레즈비언 부부와 게이부부가 부케를 던지고 있었어요. 특별히, 규진 님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그때 처음 듣게 되어 놀랐고, 축복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레즈비언 부부가 아이를 가질 수 있구나! 낯설지만 반가웠어요. 얼른 혼인평등의 시대가 오길, 규진 님 부부와 아이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퀴어퍼레이드, 이번 해에 가장 안 지치고 신났던 날이었어요. 저 스스로도 놀랄 만큼요. 벌써 다음 해 퀴퍼가 기다려지네요. 단 하루였지만 엄청난 힘을 얻고 온 날이었어요. 다른 이들도 살아갈 힘을 충분히 얻은 날이었길! 바랍니다.






마무리하며

퀴어퍼레이드에 다녀온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도 될지, 또 누구에게까지 드러내도 될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하지만 굳이 숨겨야 할 필요는 없으니 이렇게 나살핸에도 기록해 봅니다. 퀴퍼의 열기가 조금이나마 전달되었길 바라며.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마지막으로! 집 가는 길 지하철에서 우리 보시고 사탕 나눠주심.. 소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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