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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단편소설#2

by 핸내 Mar 20. 2025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친구가 있다. 무언가 미묘하게 다른 느낌을 주는 낯선 사람. 옆에 있으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평소 친구들과는 다른 감각이 느껴진다. 다가가면 전파감지기라도 단 듯, 희한하게 마음이 살랑거리면서도 딴딴해진다. 에로틱한 느낌이었던 걸까? (이 표현을 쓰기엔 너무 순수했다) 본 현상은 여자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된다. 


                                                                1

   중학교 1학년, 처음 사귄 친구 윤서에게서 묘한 감각을 느낀다. 3월 한 달간 우리는 하굣길을 함께했다. 30분 넘게 걷는 동안 끊임없이 조잘거리고, 장난친다. 입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하루는 윤서가 집에서 찍은 셀카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나는 버스정류장 기둥에 몸을 기대어 사진을 기다렸다. 윤서는 부끄러운 듯, 휴대폰을 꺼내 든다. 그 시절 뿌연 필터 사이로 그의 얼굴이 보인다. 약간 찡그린 눈과 도톰하게 내민 입술. 새초롬하니 귀엽다. 다음 사진, 렌즈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시선이 불분명하다. 몽롱해 보인다. 웃는 얼굴만 있는 줄 알았더니,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네? 사진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점차 세차게 뛴다. 얼굴에 열이 오른다.

   죄를 범한 느낌이었다. 그저 집에서 찍은 얼굴인데, 내밀한 곳을 들여다보는 듯한 야릇함이 느껴졌다. 평범한 친구가 될 수 없음을 직감했을 때, 나는 그 친구와 멀어지기로 했다. 한순간에 가까워진 우리는 순식간에 아무 관계도 아니게 되었다. 

   - “너무 좋아해서 멀어지는 거야.”

   이 말을 끝으로 마음을 정리했다. 윤서가 다가올 틈 없이 학교에서 먼저 벗어났다. 최대한 그의 눈을 피해 평범한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그 이후 우리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서툴게 첫 친구를 잃었다.


   윤서에게 느낀 이상한 감정을 꾹꾹 숨겨놓고 지냈다. 2년 뒤 미묘한 친구가 또 찾아왔을 땐, 내 마음을 감추고 적당한 거리를 두며 지냈다. 좋았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내가 갈 수 있는 유일한 인문계 고등학교인 중앙여자고등학교에.
 


                                                                2

   2년에 1번 마주하는 혼란한 시기가 또 찾아왔다. 고등학교 2학년, 승희를 만났을 때였다. 승희는 말이 없는 친구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들과 있을 땐 그랬다. 나와 있으면 유달리 말도, 장난기도 많았다. 주로 내 엉덩이를 치고 도망가는 장난이었다. 그의 낯선 모습에 반 애들은 신기해 했다.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에 숱이 많았다. 머리를 질끈 묶고 다녔는데, 손으로 머리칼을 감싸면 한 줌 가득 묵직하게 쥐어졌다. 나는 그 아이의 머리칼 만지는 걸 좋아했다. 잘 빗겨진 부드러운 동물의 털을 만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왠지 모를 안정감을 느꼈다. 

   당시 나는 마주치는 애들마다 말을 걸고 다녔다. 오지랖이 넓었다. 친구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서슴없이 다가가는 면을 좋게 봐준 덕에 반 친구들과 두루 어울렸다. 반 애들 중 절반 이상은 나와 야자 시간에 운동장을 돌아봤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두운 운동장을 돌며 한 친구, 한 친구 알아가는 일이 그렇게 흥미로울 수 없었다.


   못 견디게 야자시간이 지루한 날, 엉덩이가 둥둥 뜰 것처럼 가벼워서 물을 마시러 자주 나갔다. 복도에서 물 뜨러 온 승희와 마주친다. 어김없이 운동장에 나가자고 꼬신다. “리프레시해야 할 것 같지 않아? 우리 10분만 쉬다 오자.”고 속삭였다. 노곤한 몸을 이끌고 온 승희는 잠시 고민하더니 물었다. “들키면 어떡해?” 나는 자신만만하게 내 이력을 읊었다. 누구와 얼마나 자주 산책 경험이 있는지, 선생님을 마주쳤을 때 어떻게 의연하게 대처했는지 말이다. 짝꿍에게 화장실 다녀온다고 말한 뒤, 반을 빠져나왔다. 복도에 선생님이 없는 걸 확인하곤 자연스럽게 계단으로 내려갔다. 5분 정도 간격을 두고 승희도 반을 빠져나왔다.

   탈출 성공이다. 늦여름의 시원한 바람이 우리를 맞이한다. 상쾌하다. 환하게 불 켜진 창문을 보곤 짜릿한 마음이 든다. “어때? 별거 아니지? 잠깐만 돌다 들어가자.” 짧은 시간이었지만, 승희의 인상에 강하게 남는다. 첫 일탈, 승희는 그 맛을 봐 버렸다. 비밀스럽게 행해진 첫 일은 기억에 끈적하게 자리 잡기 마련이었다.

   그 이후로도 우리는 일주일에 3번 이상은 몰래 반을 빠져나왔다. 마음대로 야간자율학습시간에 쉬는 시간을 만들어버렸다. 빙빙 운동장을 돈 바퀴 수를 세어보니, 서로 깊어지기에 충분했다. 그러다 일이 생긴다.


   그날도 몰래 눈빛을 주고 받은 뒤, 운동장으로 향했다. 바람이 선선해진 탓에 가만히 서 있으면 몸이 살짝 떨리는 날이었다. 우리는 트랙을 따라 부지런히 돌았다. 가로등 불빛에도 마음이 일렁거리는 나이였다. 오래도록 돌다, 별관 앞 벤치에 나란히 앉는다. 건물이 꺾여 있는 탓에 으슥하다.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승희가 묻는다. “현모양처가 될 거야. 20대 초반에 결혼하고 아이 셋 낳아서 친구처럼 키울 거야.” 승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하다는 듯 쳐다본다. “아니, 너 꿈 말이야. 네가 되고 싶은 거.” 뭐가 문제냐는 듯 다시 답한다. “그니까 현모양처, 그게 내 꿈이야.” 승희에게 묻는다. “그러는 너는?” 그는 현실을 일찍 깨달은 아이 같았다. “우리 엄마 연세가 좀 많으셔. 아마 대학생 되면 첫째 언니가 나 먹여 살릴 걸? 빨리 졸업해서 취업 할 거야.” 처음 듣는 가족 얘기다. “바라는 거 딱히 없어. 안정적인 직장 들어가서 엄마, 아빠 부양할 능력 갖는 거.”

당시 승희 엄마 나이는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엄마의 나이와 같다. 내가 이제야 하는 고민을 그는 이미 전부터 하고 있었다. “엄마가 죽을까봐 무서워.” 당시엔 부모의 죽음, 그 두려움을 알지 못했다. 가족 얘기를 하던 승희가 갑자기 눈물을 터뜨린다.

   우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마음이 아린다. 애틋한 마음이 든다. 밋밋하고 납작하던 평면체가 입체적인 도형이 되어가는 것 같다. 왠지 모를 쾌감과 떨림이 느껴진다.

   승희를 껴안아 위로한다. 점차 흐느낌이 줄어든다. 말이 없었다. 승희가 내뱉지 않던 말들은 그의 안에 켜켜이 쌓여왔다.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일이 부끄럽다고 말한다. 그런 승희에게 마음의 온기를 전하고 싶다. 손을 잡는다. 그의 손은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 묶인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낸다. 승희는 머쓱한 듯 옅은 미소를 띈다. 눈망울이 맑고 아련하다. 문득 그 애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은 욕망이 차오른다.

   손을 잡고 컴컴한 운동장만 바라보고 있다. 분위기가 오묘하다. 나는 티 나지 않게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쉰 후, 입을 갖다 댄다. 입맞춤을 시도한 스스로에게 놀라며 급하게 입술을 뗀다. 승희도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말캉하게 부딪힌 촉감에 온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깨어난다. 맞잡은 손을 꼼지락 대다가 다시 한번 눈을 맞추고, 입을 맞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등을 쓰다듬고 껴안는다.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닌데,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부드럽게 핥는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멈출 수 없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키스를 했다. 운동장에서, 그것도 여자랑.


   운동장 사건 이후, 둘의 입맞춤은 몇 차례 더 반복됐다. 아무도 타지 않은 스쿨버스, 화장실, 심지어 청소 시간 커튼 뒤에서. 틈만 나면 온몸이 불타 오르던 시절이었다.

아쉽게도 겨울수련회 이후, 더 이상 승희와 가까이 지낼 수 없었다. 겨울수련회 주제는 ‘순종과 순결’이었기 때문이다. 그 주제에 빠질 수 없는 목사의 설교를 듣고, 나는 참회의 기도를 드렸다. 
   - “주님, 동성애는 죄입니다. 제가 죄를 범했어요.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그런 류의 죄를 범할 수 없었다. 설교자에게 긍휼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떨쳐내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아침잠이 많던 내가 새벽기도에 가서 회개 기도를 반복했다. 한순간의 실수가 나를 지옥불로 이끌었다. 그땐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3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되었다. 여중, 여고, 여대에까지 입학하며 완벽한 수녀 라인을 밟게 된다. 여대에 가서 인생 2막이 시작되었다. 동성에 눈을 뜨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 여중에서처럼, 새로운 세계가 내 앞에 펼쳐졌다.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다니는 여자 학우들이 눈에 들어온다. 온라인커뮤니티에서는 퀴어들이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점차 그 세계에 익숙해진다.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희의 결혼소식이 들려왔다. 결국 가는 구나. 승희는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 부모를 부양할 능력을 갖췄을까? 내가 꿈꾸던 현모양처를 왜 너가 이루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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