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회사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떠올려 보자
출근 전 가장 맑은 정신의 시간을 나에게 쓰는 연습을 하고 있다. 1시간이라도, 아니 30분이라도, 15분이라도 나가야 하는 시간보다 먼저 일어나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언제나 일어나기가 힘들다. 여러 방법들을 시도해 보고 있다. 일찍 자기, 알람을 침대밖에 멀리 두어 일어날 수밖에 없게 하기 등.(이 방법들도 도움이 되고 있다.) 그중에 요즘 찾은 괜찮은 방법이 있다. 최근 회사에서 가장 화나게 하는, 현타 오게 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이다. 고개가 절레절레 될 정도가 가장 좋다. 떠올리는 순간, 언제까지 그런 사람과 같은 공간, 시간을 보낼 것인가, 를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지고 자연스럽게 일어나 진다. 요즘 제일 먹히는(?) 사람들은 이런 타입이다.
실력과 재능이 요만큼도 없는데 노력할 마음도 요만큼도 없이 해맑게 회사를 다니는 이들. 직장생활 인간군상을 사분면으로 나눈 직장인들에게는 나름 유명한(?) 구분자에 따르면 멍청한데 게으른 ‘멍게’ 타입이다.(참고로, 그 사분면은 똑똑하냐 멍청하냐를 한 축, 부지런하냐 게으르냐를 한 축으로 해서 이를 조합한 네 가지 구분자가 있다. 똑똑한데 부지런한 ‘똑부’가 실무자의 베스트, 똑똑한데 게으른 ’똑게‘가 상사, 리더의 베스트, ’멍‘이 들어가는 ’멍부‘와 ’멍게‘는 기피대상 1순위이나 그중 최악이 ’멍게‘이다. ’멍부‘는 특유의 열심, 부지런을 동원해도 되지 않는 안타까움. 즉, 최소한의 측은지심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 ‘멍게’들은 생각보다 회사에서 잦은 빈도로 출몰한다. 두 가지 정도 이유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멍게’들은 그야말로 ‘멍’ 사이드의 최고봉이자, ‘게’ 사이드의 최고봉이므로 자신이 ‘멍게’인지 알 수가 없고,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 많은 주변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고 이런 상황이 발생해도 대부분 이를 모르거나,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개선이 되지 않은 채로 주위를 떠다닌다. 더불어서 주변에서 피가 철철 나도 피가 나는지, 싹이 나는지 관심이 없고, 왜 주변사람들이 힘들어하는지 알고자 하는 노력 또한 하지 않는다. 왜? 내가 멍게인지 모르니까.(이 뫼비우스의 띠 같은 갑갑함이 무한반복된다.) 두 번째는, 이 개선이 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를 무한 생성하는 ‘멍게’들을 회사는 생각보다 그냥 가만히 둔다. 생각보다 한국의 회사 씬에서는 트럼프가 나왔던 리얼리티 같은 ‘You're fired!' 같은 극적인 상황들은 별로 없다. 대기업, 스타트업을 불문하고 흉흉한 소식들 사이에서 한국의 정서적인 부분들은 꽤나 작용을 한다. 또한, 사실 회사도 이들에게 개선이든 더한 조치든 무언가를 하는 게 부담스럽다. 왜냐? 아무리 얘기해도 모르니까.(또, 아까 그 패턴 무한반복)
요 근래 제법 가까운 영역에서 ‘멍게’가 등장. 보고 듣는 모든 이들이 이 갑갑함을 느끼고 있다. 정작 당사자는 회사생활이 매우 즐거운 것 같다.(이게 ‘빡침’의 포인트) 이런 경우 아 볼란다, 눈을 감을란다, 를 다짐하지만 인간의 시야는 생각보다 좌우 먼 곳까지 가닿는다. 그리고 연차가 쌓이면 사무실 소리, 공기만으로도 모든 게 느껴진다.(쓸데없는 능력발휘) 그런데 이 ‘멍게’를 답답해할 줄만 알았지, 내 아침을 깨우는 서늘함으로 최고의 역할을 한다는 걸 요즘 깨달았다. 이를 갈고 복수해야지 같은 분노나 화의 감정보다는, 그래서 계속 갑갑한 채로 이런 식의 남 탓, 남 욕만 하면서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안 한 채로 시간을 흘려보낼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쯤 스르륵 몸이 일으켜진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회사에는 이런 식의 답답함, 짜증, 화, 슬픔, 좌절을 유발하는 많은 인간군이 존재한다. ‘멍게’가 시들해질 즈음이면 더한 누군가가 반드시, 기필코 나타나 있을 것이다. 이들을 유의미하고 무해하게 활용(?)하는 방법을 드디어 찾았다. 오늘의 그들에게 감사하고, 앞으로 역할을 할 그들에게 미리 감사한다. 덕분에 나는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나 조금의 전진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