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들과 점심으로 찜닭을 먹으러 갔다. 한 번에 몇 사람의 음식이 큰 그릇에 나오고 각자의 작은 그릇에 먹을 만큼 덜어가며 먹는 곳이었다. 특이하게 누룽지를 부셔서 소스와 같이 먹을 수 있는 곳이라서 함께 시켰다. 음식이 제법 빨리 나왔고, 각자 음식을 한 번씩 덜어낸 후 ‘맛있게 드세요’를 외치며 먹으려던 참이었다. 누룽지를 마저 가져다주던 사장님이 우리가 먹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아유~나는 찜닭을 이렇게 먹는 사람이 제일 싫어, 내가 먹는 방법을 알려줄게요. 소스를 듬뿍 끼얹어서 먹어야 한단 말이야‘ 어찌할 새도 없이 우리들의 그릇에는 소스가 두 번 세 번 퍼올려졌다. ‘누룽지도 말이야, 미리 이렇게 넣어서 먹어야 맛있다구’ 누룽지도 어찌할 새도 없이 이미 큰 그릇에 부셔서 소스와 버무려지고 있었다. 약간 어색한 느낌이 들었는데, 밥 먹는 자리라 다 같이 하하하 웃으며,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사장님이 물러간 후 한 동료가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 ‘아, 나는 근데 누룽지 그냥 소스에 찍어먹고 싶었는데.’ 사실 나도 소스를 많이 끼얹지 않은 건 조금이라도 덜 짜고 맵게 먹으려던 것이었다.
이후 맛있게 잘 먹고 나왔는데, 아까의 상황이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졌다. 왜일까를 계속 생각해 보니 내가 정답이라고 믿는 사람과의 대화가, 상대방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저질러져 버린 강요가 불편했던 것 같다. 기껏 점심 먹는데 까칠하게 구네, 사장님이 맛있게 먹는 법을 알려준 거잖아, 할 수 있겠으나, 어쩐지 찝찝했다. 상황과 장소와 정도만 다를 뿐, 회사 안에서 많이 보던 장면이라서였다.
회사에서 ‘내가 정답’이라고 믿는 대화는 무수하게 많다. 허나 회사 안에 벌어지는 일들은 더 나은 결론이 있을 뿐이지, 정답은 없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마치 정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거, 원래부터 그래요.’ ‘그거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원래부터라는 게 어딨나. 회사의 업력이 길건 짧건, 나의 전임자가, 나의 선배들이 가장 최선의 안을 프로세스라는 방법으로 고민해 둔 것이지, 태초에 회사라는 조직이 생길 때부터 자연발생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회사일이 조금씩 익숙해져 갈수록, 마치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게 연차인가, 경력인가라는 하는 생각이 든다. 그건 착각과 도취다. 몇 번의 이직을 해보니 알겠다. 업계나 혹은 일반적으로 회사에서 주로 쓰는 방법론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원래부터 그런 건 없다. ‘그 회사’가 ‘그때’ 가장 나은 방법을 채택하고, 그게 이슈가 없기에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의사를 물어보지 않은 강요는, 보통 위의 정답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저지른다. 야근을 하면 수당을 주는데 왜 야근을 안 하냐고 묻는 상사가 있었다. 법적으로 정해진대로 1.5배, 심야는 2배까지 주는데 왜 돈을 마다하냐고. 돈이 정답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돈’만이 정답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일이 많이 몰리는 시기도 아니었는데, 마음대로 근무계획표에 내 이름을 쓰려고 했다. 이런 식의 강요는 무수히 많다. 건너 건너 팀에서는 상사가 팀원의 책상을 정리해 버린 적이 있었다. 팀원은 나름 자기만의 규칙대로(보통 무질서 속의 질서라고 하는) 사용하던 모양이었는데, 상사의 눈엔 정리정돈이 안된 상태였나 보다. 어느 날 아침에 와보니 상사가 자기방식대로 싹 치워놓고는 ‘내가 임마, 다 치웠어. 고맙지? 커피사라’라고 했다 한다. 어디가 이상한지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기껏 찜닭을 먹고서는 장황하게 얘기한다고 하리라. 허나 소스를 적게 먹고 싶은 사람도 있고, 누룽지를 따로 먹고 싶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내 생각이 정답이라는 확신이 들면, 그 즉시 한 번만 멈춰보자. 그래도 정답이라는 확신이 들면, 그게 특히 다른 사람을 향한 말이나 행동이라면, 제발 미리 저지르지 말자. 이런 방법도 있다고만, 알려주거나 권유해 보자. 정답은 없다. 원래부터 그런 것도 없다. 적어도 회사나 조직 안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