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에 문서만 쓰고 싶다는 사람이 없어서 님을 뽑았어요"
마흔 중반을 넘어가는 경력 단절 엄마.
이런 내가 젊고 똑똑한 청년들로 가득한 지금의 IT 회사에 다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를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답하길 기대할 것이다. 관련 전공이었기 때문이거나, 경력이 워낙 좋아서이거나, 혹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 어떤 것도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내가 다시 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들이 기꺼이 맡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기피 업종이라고나 할까?
나는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 포지션을 선택했다. 회사 안에서 흔히 ‘문서 업무’로 뭉뚱그려지고, 중요도는 낮게 평가되며, 없어도 당장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처럼 여겨지는 역할이다. 바로 테크니컬 라이터다.
많은 조직에서 문서는 결과물에 비해 과정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잘 작성된 문서는 눈에 띄지 않고, 문제가 생겼을 때만 존재감이 드러난다. 그렇다 보니 이 일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려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커리어 관점에서 보면, 이 지점이 오히려 기회가 된다. 아무도 선뜻 맡지 않으려는 일에는 경쟁자가 거의 없고,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 내가 이 일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대학교 시절 C 자료구조론 수업에서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내 기억에서 평생 떠난 적이 없다.
"남들이 하지 않으려는 걸 선택하세요."
그분은 당시 서른 초반쯤 되어 보이던 비교적 젊은 분이었는데(아마도 정식 교수가 아니라 박사과정 대학원생이 아니었을까 싶다), 본인 역시 남들이 기피하는 어려운 전공을 선택했다고 했다. 배우는 과정은 힘들고 외로웠지만, 그 분야를 공부한 사람이 거의 없기에 요즘은 득이 되고 있다는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대학 3학년이던 당시 들었던 이 말이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 내 기억에 남은 걸 보면 그 말이 내게는 꽤 강렬했나 보다. 기피의 이유가 그 분야가 어려워서 이건 아니면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지 못해서 이건,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선택한 사람은 결국 희소성을 갖게 되고, 그 희소성은 가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이 말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보통 회사에서 '문서 업무'라고 하면 으레 '잡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테크니컬라이팅 (Technica Writing)이라고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직업명 그대로 기술 문서를 작성하는 일이 주요 업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 실제로 문서를 '직접 쓰는'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테크니컬라이터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루 종일 하는가는 다른 글에서 다뤄볼 예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업의 타이틀 자체가 'writing'에 초점이 맞춰있다 보니, 그저 문서를 양산하기만 하는 지루한 업무라고 여겨진다. 더구나 '문서'라는 단어가 물성을 가진 종이에서 기원하다 보니, 모든 것이 디지털로 처리되는 요즘에도 '문서'라고 하면 그저 워드에 타이핑하고, 프린터로 출력하는 정도의 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많다. 심지어 하루 종일 문서를 철(바인딩)하는 자면까지 함께 떠올리는 경우도 있다.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맡고 있는 이 포지션으로 내부 이동을 희망하는 사람이 있는지 부서 내에서 한 차례 조사가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우리 부서는 대부분이 엔지니어다. 지원자를 모집했지만 아무도 없었고, 결국 이 자리를 채우기 위해 외부 채용 공고를 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본인의 트러블슈팅 경험이나 새롭게 알게 된 노하우를 기록하는 것을 즐긴다는 한 엔지니어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필요해서 글로 정리하는 건 좋아하는데요, 제품 릴리즈 일정에 맞춰 마감이 있고, 언제까지 어떤 문서를 써야 한다고 정해져 있으면 그건 좀 싫을 것 같아요.”
속으로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제가 만든 제품도 아니고 남이 만든 제품을 주제로 글을 작성하는 일이 항상 즐거운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럼 하기 싫은 일을 왜 하러 오셨어요'라는 질문으로 귀결되는 어설픈 말싸움의 형국이 될 것 같아, 옅은 미소와 함께 입을 다물고 그저 고개만 끄덕거려 주었다.
우리는 직업을 '재미'만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설사 그렇게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어떤 분야든 일 자체의 성격 때문이건 사람 간의 문제로 인한 것이든 '장벽'을 만난다. 그리고 개인별로 다른 그 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은 낮은 일을 우리는 자신의 '직업'으로 삼아 오래 가져가게 된다. 테크니컬라이터라는 직업은 나에게 그런 선택이었다. 직업적으로 꾸준히 유지할 수 있는, 나만의 마지노선.
그리고 이런 나의 직업적 선택이 시장에서 유효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역시 '희소성'이다. 남들이 기피하는 그 잡일을, '제가 그 일을 제가 잘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을 때 나를 반겨주는 이유다. 물론 일의 종류 by 종류다. 이 기피 업무가 어느 정도 진입 장벽이 있는 일이라면, 업무를 잘 처리하기 위한 각자의 경력 또는 기본적인 지식과 스킬은 당연히 본인의 역량으로 평소에 다듬어 놓았어야 한다.
기술 문서를 쓰는 일이 밤에 잠도 안 올 정도로 열정적인 일은 아니다.
남들이 ‘우와’ 하고 감탄해 주는 직업도 아니다.
회사 안에서 핵심 인재로 분류되는 일도 거의 없다 (며칠 동안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경우도 있다).
회사마다 테크니컬 라이터에게 기대하는 역할과 업무 범위는 제각각이고, 그 정의가 모호한 경우도 많다. 그래서 이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학원 시절 논문 지도를 해주시던 교수님은 미국에서 일하다가 유럽으로 건너오신 분이었는데, 미국에서도 테크니컬 라이팅 관련 학과는 점점 사라지는 추세라고 했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글쓰기 능력이 전반적으로 상향 평준화되었고, 굳이 ‘라이터’를 별도로 고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IT의 최전선에 있는 미국마저 이런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솔직히 맥이 빠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나는 전통적인 테크니컬 라이터의 업무 영역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요즘 개발자가 디자인 툴을 어느 정도 다룰 줄 알아야 하고, 디자이너 역시 프런트엔드 개발에 대한 이해를 요구받는 것처럼, 테크니컬 라이터 또한 역할의 경계를 넓혀가야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은 오히려 신이 난다.
AI시대를 맞아 내 직업이 얼마나 더 재미있어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