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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테크니컬라이터 하려고 대학원까지 나왔다고요?

by 피넛버터

얼마 전 유치원에 다니는 딸아이가 묻는다.

"엄마는 직업이 뭐예요?"


예전 같았으면 '엄마는 컴퓨터 만드는 회사에 다녀'라고 내 '직업'이 아닌 '직장'을 이야기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참고로, 실제 지금 내가 다니는 회사는 컴퓨터 하드웨어 쪽이 아닌 기업용 서버에서 돌아가는 애플리케이션이나 서비스를 개발하는 분야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 직업 앞에서 아이에게 '정확'하고 싶었다.


엄마: 음... 엄마는 '작가'야.

아이: 우와, 엄마 작가야? 그런데, 엄마 책은 어디에 있어?

(잠시 당황)

엄마: 음 책은 없어. 엄마는 회사 사람들만 읽는 글을 써. 그리고 네가 읽는 책처럼 종이로 만들어지지 않아.


명쾌하게 답하지 못하고 늘 '음...'으로 시작하게 되는 내 모습이 살짝 안타깝다는 자기 연민에 빠지려는 순간, 이거다! 유레카! 오히려 아이와 이야기하다 보니 명확해졌다.


technical writer라는 직업을 설명할 때 사전적 정의 말고 뭔가 비 업계 사람들 (특히 젊은 연령)에게 한 문장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를 수년 째 고민해 온 나다.

딸아이와 얘기를 하다 보니 한 번에 정리가 되었다.


"회사에 소속된 작가로서, 회사나 제품 관계자들이 읽을 기술적인 내용의 글을 쓰는 사람"


물론 테크니컬커뮤니케이터 등의 이름으로 개인적으로 외부에 글을 기고하며 글을 쓰는 분들도 제법 계시는 걸로 알고 있으나, 이런 경우는 예외하고 보통 회사에 소속된 테크니컬라이터 기준이다 (어떻게든 작가라는 한글 단어를 끼워 넣고자 하는 나의 사사로운 열망이 묻어나는 정의라 할 수 있다)


테크니컬라이터가 뭐 하는 직업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일단 직업 소개부터 해야겠다. 영어로는 Technical Writer라고 한다. 기술적(technical) 글을 쓰는 사람(writer)이다.


ChatGPT의 정의로는,

"복잡한 기술·제품·서비스를 사용자와 이해관계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명확하고 구조화된 문서로 표현하는 전문 커뮤니케이터"라고 한다.


내가 테크니컬라이팅이라는 용어를 접한 건 20대 후반이다.


한국의 취업시장에 큰 관심이 없던 관계로 대학 졸업 후, 해외를 돌아다니다가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영어와 컴퓨터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지원 가능'이라는 한 IT회사의 채용 공고에 끌려, 해외 기술지원 엔지니어로 IT 세상과 인연을 시작했다.


지난 12년간 기술지원엔지니어, 테크니컬라이터, IT프로젝트매니저를 오갔다. 그리고 결국 기술을 천천히 이해하고 그걸 글로 차분히 표현해 내는 일이 내가 스트레스성 장염에 걸리지 않으면서도 성과를 낼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남들이 알지 못하지만, 심지어 어떤 일을 하는 건지 설명한다 해도 그게 '직업'이 될 수 있는지 조차 갸우뚱거리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나는 Techncal Communication을 배우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설명하자면 길어질 약간의 '도피성' 유학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떤 전공을 할지 꽤 오랜 기간 고민한 끝에 선택한 나의 귀한 전공이다.


대학원을 졸업 후, 회사 면접을 가면 Techncal Communication 전공에서는 뭘 배우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꽤 있다. 최대한 짧게 설명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글을 저장하는 매체가 더 이상 아날로그가 아니라, 디지털이기 때문에 이 디지털 정보를 생성하고 보이는 tool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 전공에서는 기본적으로 웹프로그래밍을 배우고, 그래픽적 표현도 필요하기에 어도비 툴도 배우고, 언어의 localization, 정보 구조론, Technical English (기술 영역에서만 사용되는 특수한 형태의 simplifed English) 등을 공부합니다"


사실 졸업하고 보니 약간의 직업학교 같은 느낌도 있지만, technical writing이 어찌 되었건 순수학문도 아니고, 좁은 영역에서 깊이를 가져야 할 학문도 아니기에 산업 현장과 밀접하면서도 굉장히 practical 한 과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점이 마흔 중반을 앞둔 나이에 이 전공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1년 반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대학원 생활을 마치고, 나는 무엇으로 생업을 영위할까 많은 고민을 했다. 한국에 테크니컬라이팅 교육 센터를 차려볼까? 해외의 콘텐츠 관리 앱을 한국에 도입해 볼까? 상상력이 AI시대는 경쟁력이라는데, 추진력이 오히려 더 필요한 능력 아닌가 의심해 본다.


이런 저런 고민만 하던 중 아이들은 쑥쑥 자라나고 생활비는 바닥을 보이는 현실에 무릎을 꿇었다.

안되겠다.

일단 취직하고 돈 벌면서 생각하자!


그렇게 나는 다시 테크니컬라이터로서 일을 시작한다. ('귀사에서 생성하는 문서라는 형태의 정보를 구조화, 모델링, 표준화해보고 싶습니다' 같은 포부가 아니라서 채용담당자에게는 개인적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다음 글에서는, 테크니컬라이터로 다시 시작한 내 커리어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기술 문서 체계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회사에서 처음부터 문서화 프로세스를 빌드업해 나가는 경험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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