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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퍼 Dec 08. 2021

부다페스트 04

어부의 요새 첫 번째

“걸으면 보이는 도시, 서울” 발매 때문에, 실제로 내가 뭘 한 건 없음에도, 뭔가 정신이 팔려 요 며칠 이곳 생활을 거의 기록하지 못했다. 하나, 퇴근 후 걷기는 게을리하지 않아,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부다페스트의 구석구석을 정말 많이 돌아다녔다. 퇴근 후 저녁 식사를 해야 하기도 했지만, 정말로 이렇게 멋진 도시를 그냥 내버려 둔 채 도저히 좁은 방구석에 틀어박혀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도시가 유혹하면 일단 나가야 예의다. 걷기 먼저, 글은 나중.


시점을 일단 부다페스트에서의 첫 번째 금요일로 돌리자면, 나는 후배들과 세 번째 걷기를 했다. 우리는 숙소에서부터 약 2킬로미터 떨어진 ‘어부의 요새’로 목적지를 정하고, 호텔 앞에서부터 발걸음에 힘을 실었다. 건장한 남자 셋이 있으니 낯선 타국의 으스스한 밤거리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노선명을 알 수 없는) 기찻길 위 다리를 지나 북동쪽으로 향해 조금만 더 걸으면 Babits Mihály emlékmű 라는, 발음하기 어려운 공원이 나오는데, 그 인근부터 길이 경사지기 시작하더니만, 이내 계단길에 이르고, 계단을 얼마 오르다 보면 금세 언덕의 정상이다. 이 언덕 위에 어부의 요새가 있단다. 계단 끝에서 올라온 방향을 돌아보니 저 너머 언덕 위로 반짝이 가루가 뿌려진 듯 점점이 불을 밝힌 마을이 인상적이었다. 후배는 “저기 한남동 아니에요?”라고 농담을 했는데 느낌이 조금 비슷하긴 하지만, 한남동 언덕보다는 더 크고, 집들의 밀도는 상대적으로 낮다. 

왠지 친숙한 구릉지 동네

한남동이 언급되어하는 말인데, 한남3구역, 우사단길 동네는 잘 있나 모르겠다. 올해 말부터 이주 및 철거가 시작된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는데, 들리는 말로는 조합장 선거 같은 문제로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하는 것 같고... 역시 돈이 몰리는 곳에서 진흙탕 싸움은 피할 수 없나 보다. … 여기 부다페스트는 한국과 같은 재개발이 있을까? 오스트리아의 지배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을 겪으며 (속 사정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외형적으로는) 유럽의 어느 국가 못지않는 도시 조직이 이미 오래전에 세팅이 되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도시 자체가 이미 관광자원화되었으니 한국, 특히 서울과 같은 다수의 광범위한 재개발은 (산업 또는 환경의 대대적 변화가 있기 전까지는) 불필요해 보인다. 반면 서울은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며 도시 조직이 두서없이 생성되었고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1960년대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수시로 뜯어고쳐지고 있는 것이다. 국가적, 역사적 상황에 의한 차이이기에 무조건적으로 어디가 더 좋고, 어디가 더 나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겠다. 다만 세대를 넘나들며 집단적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도시 곳곳에 많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부다페스트는 정말 부럽기 짝이 없는 도시이다. 

숨이 차게 마지막 계단을 오르니 우리의 목적지에 얼추 가까워진 듯하다. 고풍스런 건물들 사이로 탑 하나가 유별나게 높이 솟은 성당이 환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하늘에 닿을 수만 있으면 얼마든지 더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첨탑과 마치 종유석처럼 솟은 작은 첨탑들이 대번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세로로 긴 창문과 끝이 뾰족한 (아무튼 뾰족한 거 엄청 좋아한다) 첨두아치 정문, 그리고 그 위 기하하적 무늬의 원형창문(장미창이라고도 한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전형적인 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행여 고딕 양식에 대해 모르더라도 어렴풋하게 보고 들은 바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명동성당은 아름다운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 아니면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성당은 대표적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써~~~”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성당과 통성명하기도 전부터 양식부터 거론을 함은 좀 반칙 같지만, 말이 나온 김에 간단하게나마 서양 건축의 역사와 양식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먼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학부 시절 건축이란 학문에 홀딱 반해버린 많은 건축학도 중 하나였다.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건축 서적을 뒤적이고, 하루 중 설계실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유별나게 서양건축사엔 별 관심이 없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장식이 없이 깔끔하고 세련된 '근대(모더니즘)' 건축에 유독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실상 나는 모더니즘 건축가 아돌프 로스가 한 말, "장식은 죄악이다"의 신봉자 중 하나였는데 이는 그때까지 제대로 된 고전풍(근대 이전의 모든 양식을 의미한다) 건축물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말 그대로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것이 한몫했다. 말이 좀 길어졌는데, 아무튼 나는 서양건축사 수업이 너무 지루했다. 이름 조차 외우기 힘든 건축양식들은 모두 다 그게 그것 같았다. 특히 수업을 재미없게 만든 것은 연대기처럼 이어지는 건축양식의 배열이었다.

이를테면 이렇게, 순차적으로 구성된 교재는 정말 최악이었다. 수업 중 나의 모습은 이랬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건축 특징이 나온다. 간단한 역사적 배경도 나온다. 물론 두 상황이 입체적으로 연결되진 않는다. 졸리다. 미리 준비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유명 건축물 사진 또는 그림이 나온다. 각 건축 요소에 대한 깨알 같은 명칭이 나온다. 졸리다. 잠이 든다. 잠이 든다. 정신을 차린다. 어느새 유명 건축물의 단면이다. 각 부분의 특징이 나온다. 그림 속 건물로 빠져든다. 깊게 잠든다. ... 수업이 재미없었던 여러 이유가 있기만 일단 가장 큰 문제는 건축사의 흐름이 전체적이고 종합적으로 그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처음부터 세부적인 내용으로 훅 들어갔다는 점이었다. 즉 전반적인 세계사적 흐름이 배경 지식으로 먼저 깔리고 그 뒤에 그에 대한 결과 또는 원인으로 건축사조가 설명되었어야 조금이나 흥미가 붙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시간 순서에 의한 연대기적 흐름은 자칫 각각의 건축양식이 선후의 관계로 얽히며, 명확하게 구분된 뚜렷한 특징이 있을 것 같은 착각(?)을 갖게 되는데, 정작 책을 보다 보면, 그 양식이 그 양식 같고, 글로 쓰인 것처럼 구체적인 차이점을 좀처럼 찾을 수 없어, 나의 이해력 문제인가 하는 좌절과 함께 점차 알쏭달쏭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문제가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건축양식의 흐름은 전자의 뿌연 구름처럼,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가족 간의 오묘한 공통점처럼 건축 양식은 둘 사이의 경계가 오묘하게 겹치는 경우도 많고, 이것저것 뒤섞인 경우도 많았다. 즉 양식은 느슨하게 뭉쳐져 있기에 그 개별적 특징보다는 먼저 시대적 흐름에 집중을 했어야 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서, 학문적(?)인 정확도는 떨어질 수 있다

복잡계에서 단순한 패턴을 찾고, 그 안에서 인과관계를 파악하려 하는 것은 우리 인류, 호모 사피엔스의 본능이자,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공통된 세계관이다. 또한 야생에서 신체적으로 특별하게 나을 것 없는 우리 인류가 생태계에서 최상위에 오르게 해 준 것도 바로 이런 본능이자, 능력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앞서 선형적으로 나열된 것보다, 뭔가 복잡한 역사 속에서 인과관계가 읽히는 것 같지 않는가? 

중세시대 기독교의 절대적 우세와 체계화와 함께 종교 건축은 로마네스크를 거쳐 고딕 양식으로 완성되었다. 그 와중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며 돈을 모은 영주들은 종교가 아닌 학문(이성)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려 했으며, 그로 인해 인본주의와 르네상스가 태동하였다. 물론 영주들의 세력이 강화되자 그에 대한 저항으로 왕권이 강화되었고 궁중문화도 꽃을 피웠다. 이에 돈이 많은 귀족, 부르주아 역시 자신만의 가치를 높이고자 노력을 했는데, 그에 따라 틀에 박힌 고전풍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상과 곡선이 가미되어, 바로크부터 로코코 등이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아이스크림이 맛있다고 매일 먹을 순 없듯, 지나치게 화려한 것만 추구하던 분위기에 거부감을 느낀 지배계층은 다시 고전(그리스, 로마)으로 회귀하기도 했고, 또다시 그에 대한 반감은 낭만주의를 낳기도 했다. 한데, 이미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 등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계급주의 사회는 일대 혼란과 격동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때부터 복잡계는 이전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분화되고, 복잡해지고, 다양해져서 특정한 건축적 흐름을 잡기란 어려워졌다. 단지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일단 건축물을 소유하는 자본가들이 전례 없이 확산되었고,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이전에 흔하게 쓸 수 없던 재료, 철과 콘크리트가 대량으로 생산되었으며, 두 재료의 조합으로 인하여 예전에 없던 저렴하면서도 효율적인 구조물이 가능해졌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근대 이후 건축물, 근현대 건축물이다. 대부분 네모 반듯하고, 장식이 없고, 채광창이 자유로우며, 건축물이 덩어리가 아닌, 외피로 둘러싸인 막(shelter)처럼 느껴지는, 바로 그 건축물 말이다. 

이번 글에선 일단 맛보기용으로 가볍게 훑었지만, 이후 기회가 되면 조금 진득하게 세계사와 맞물린 서양 예술사, 건축사를 정리해 보련다. 여담이지만, 서양건축사에 관심이 생긴 것은, 영국과 프랑스를 방문하며 세인트 폴 성당과 노트르담 성당을 직접 두 눈으로 바라본 후였다. 마치 종이로 만든 것 같은 현대 건축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감과 수많은 조각상들에 투입한 인력의 총아를 보고 있노라니, "과연 어떠한 에너지(권력이라고 하자)가 이렇게 경외감 넘치는 인공물을 만들게 하였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귀국 후 곧바로 관련 서적을 탐독하였다. (물론 남달리 휘발성이 강한 기억력으로 인하여 다 까먹었지만) 

말이 너무 길어졌는데, 이제 이 성당과 통성명을 할 시간이다. 첨탑이 유별나게 솟은 이 비대칭 고딕 양식 성당의 이름은 '마차시 성당(Mátyás templom)'이다. 간혹 '마탸슈'라고도 하는데, 구글 번역기로 들어본 'Mátyás' 발음은 좀 오묘하다. "마ㅌ차슈ㅣ" 뭐 이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마차시는 15세기 중후반 헝가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성군으로, 헝가리 국민들이 특히 좋아하는 왕으로써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대왕' 정도 된다고 하는데, 그가 원래 이 자리에 있던 성당의 첨탑을 지금처럼 높게 증축하게 지시했다고 하여 '마차시 성당'이란 이름이 붙어졌다고 한다. 

'마치시'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당이라고 할 수 있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처음 이 자리에 성당을 지은 왕이 11세기 초, 헝가리 왕국의 초대 국왕인 '이슈트반 1세'라는 점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 대부분은 이슈트반 1세가 교황청으로부터 왕권을 인정받고, 공식적인 왕국이 되었다는 것처럼 언급하는데, 어떤 글은 그게 또 아니라고 하니... 좀 헷갈린다. 어쨌거나, 이슈트반 1세가 왕권을 가지고 삼촌과 다툴 때 '왕의 자리는 신이 준다'는 왕권신수설을 명분으로 (선왕의 아들인) 자기가 왕이라 주장했다고 한다. 그렇게 치면 중세 유럽에서 '신'은 오직 '하느님'이고, 그 신과 가장 밀접하게 엮인 사람은 '교황'이다. 당시 유럽에서 왕권에 대한 명분이 필요할 때, "교황이 인정했다"만큼 잘 먹히는 약발이 있었을까? 어쩌면 이것은 이슈트반이 기독교를 전파할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이야기가 또 샜다. 다시, 이 성당에 주목하자. 앞에서 역사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고딕 양식'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다. 일단 고딕 양식의 구별법은 아주 간단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 첨두아치(끝이 뾰족한 아치), 수직으로 긴 창호, 플라잉버트레스(높다란 벽에 옆으로 쓰러지지 않게 잡아주는 일종의 영구적인 비계?) 일단 이런 것들이 조합되어 있으면 “고딕 양식으로 추정되는데…”라고 말해도 되고, 여기에 스테인드 글라스나, 원형창(장미창), 북유럽풍의 단순 반복되지만 화려하고 복잡한(앞뒤가 안 맞나?) 패턴과 조각이 들어가면 “고딕 양식, 맞다”라고 말해도 크게 부끄럽지 않다. 앞서 중세시대 기독교의 영향력에 대해 간단히 언급했지만, 정말로 중세시대는 오로지 종교만을 위해 전 사회체계가 운영되었다. 한데 옛날에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믿어"라고 하면 설득력이 없었던 것 같다. '교부철학' '스콜라철학' 학파가 등장하여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화하려 노력했으니까. 최경철 건축가의 '유럽의 시간을 걷다'에 따르면 스콜라철학의 대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기독교적 아름다움의 조건이 정립되었는데 그 조건은 바로 '비례' '완전성' '명료성(광채)'이고 그중  명료성은 다시 "빛"을 의미한다고 한다. 결국 교회는 그리스도로 상징되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을 향해 하늘로 하늘로 솟을 수밖에 없었고, 그 빛을 적극적이고 신성하게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데 온 정성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로 향하는 의지는 결국 첨탑과 높게 솟은 지붕으로 형상화되었고, 빛에 대한 열망은 수직으로 긴 창과 스테인드 글라스로 완성되었다. 

일단 내가 주워들은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옮겨 쓰긴 했는데, 다 필요 없고 고딕성당 내부로 한 번만 들어가 보면 된다. 단번에 그 엄숙하면서도 빛에 의한 극적인 효과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렇다. 고딕성당은, 성당 그 자체가 성경이자 교리의 극적인 공간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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