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도 착해지는 게 먼저다
착한 기업, 착한 브랜드, 그리고 착한 디자인.
명절 연휴가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하고 보니 이번 명절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명절이었던 것 같다.
가족들도 못 만나고, 명절을 간소하게 지내니 좋은 점도 많았지만 아쉬움도 컸다.
난 가족들에게 보낼 선물을 고르느라 정신없이 바쁜 명절을 보냈다.
오랜 기간 선물세트 디자이너로 일했던 내가 선물을 고를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
바로 '착한 디자인'의 선물을 고르는 것이다.
'착한 디자인'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람도 착한 사람이 있고, 브랜드도 착한 브랜드가 있듯이 디자인도 착한 디자인이 있다.
언제부턴가 착한 소비가 트렌드로 등장하면서 기업들도 환경문제에 신경을 쓰고, 공정무역을 하고, 기부활동을 하는 등 착한 기업이 되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늘리고 있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에게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자란 우리에게 착한 기업, 착한 사람, 착한 브랜드에 이어 착한 디자인까지 좋아하는 트렌드는 어쩌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나도 언제부턴가 직원들에게 착하게 대하지 않는 오너가 경영하는 기업, 제품의 제조과정에서 생겨나는 불공정한 거래가 의심되는 착하지 않은 제품, 그리고 착하지 않은 성장과정을 통해 성장한 사람들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갖게 되었다. 그런 기업의 제품을 사는 것이 꺼려지기도 하고, 그런 사람이 나오는 프로그램이나 스포츠 경기를 보는 것이 불편해졌다.
착하지 않다는 것은 법적으로 제재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그 기업이나 사람의 감춰진 민낯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작은 귓속말에 귀가 기울여지듯이 쉽게 볼 수 있는 겉모습보다 더 관심이 갔다.
그렇다면 착한 디자인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착한 디자인 역시 착한 사람이나 착한 기업처럼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디자인을 처음 보았을 때 알아보기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착한 디자인은 쓰면 쓸수록,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그 제품을 좋아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디자인을 통해 지속적인 제품 구매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선물용 제품들의 패키지디자인을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난 얼마 전 친구한테 곶감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었다. 평소 친분도 꽤 있고 상당히 착하고 스마트한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보내준 선물을 받고는 실망감이 컸던 기억이 난다. 선물의 가격이나 제품의 질 때문이 아니다.
곶감 한 알을 먹을 때마다 너무 많이 나오는 쓰레기 때문에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처럼 제품을 과대 포장해서 만든 디자인을 보면 딱 그런 느낌이 든다.
곶감 한알을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비닐 파우치에 포장한 후 다시 코팅된 종이박스에 띄엄띄엄 넓게 펴서 담고 곶감들 사이에는 다시 종이 간지가 들어가 있어서 20개 남짓되는 곶감이 정말 커다란 박스에 담겨있었고, 또다시 보자기로 예쁘게 포장되어있었다. 곶감 한 알을 먹을 때마다 플라스틱 용기와 비닐 파우치 하나를 버려야 했고, 남은 곶감 몇 개를 냉동실에 보관하고 나니 커다란 종이 박스와 종이 간지들까지 많은 양의 쓰레기를 버려야 했다. 재사용이 될지 애매한 보자기는 결국 버리지 못하고 집안 어디엔가에 있다. 코팅된 종이박스가 재활용이 될지도 의문이었다.
이런 문제는 비단 곶감 패키지디자인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얼마 전 홈쇼핑에서 구매한 건강보조식품의 경우도 많아 보이기 위해 굳이 알약 한 알 한 알을 플라스틱 블리스터 케이스에 포장해서 종이박스에 담고 또 일명 싸바리 박스라고 불리는 코팅된 고급 종이박스에 이중 삼중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마치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말이다.
그래서 난 결국 다른 제품으로 갈아탔다.
쓰레기가 많이 나오기 때문도 있었지만, 자신 없는 품질을 감추기 위해 과대 포장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다른 제품보다 품질이 좋지 않았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왠지 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아직도 선물의 가치를 제품의 크기로 결정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예전에 선물세트를 디자인하면서 디자이너들의 가장 큰 역할은 같은 가격대의 다른 제품들보다 더 푸짐해 보이도록 디자인을 하는 것이었다. 매장에서 직접 제품을 눈으로 보고 골라야 했고, 경쟁사랑 비교해서 더 푸짐해 보여야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소비자들도 더 똑똑해지고 있고, 인터넷 쇼핑도 많이 늘어났다. 인터넷에서는 제품의 정확한 용량과 크기, 가격비교, 그리고 소비자들의 평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물론 내가 받은 선물의 가격이나 정보도 자세히 검색할 수가 있다.
따라서 커 보이는 것, 푸짐해 보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작아도 실속 있는 제품과 정직한 디자인의 제품을 고르는 것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이제는 디자인도 어떻게 하면 더 착한 디자인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되는 시점에 와있다.
환경에 유해한 포장재를 덜 쓰는 디자인을 고민하고, 자연친화적인 소재의 포장재를 개발하고, 제품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감추지 않고 누구나 잘 볼 수 있도록 디자인하고, 다양한 소비층을 끌어안을 수 있는 디자인을 고민해야 하는 등, 그동안 소홀했던 착한 디자인에 대한 고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에 와있다.
물론, 지금도 많은 기업의 브랜드 매니저들이 착한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제로 웨이스트 캠페인에 동참하기도 하고, 그린 컨슈머를 위한 제품도 속속 개발하고 있다. 디자이너들도 환경을 생각하는 다양한 에코 패키지 개발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으며. 실제 성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참 재미있는 사실은 착한 브랜드를 만들거나 착한 디자인을 지속성을 가지고 실천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브랜드도 디자인도 자신이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만드는 기업이나 사람의 철학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아직도 친환경을 실천하려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고, 그렇지 않은 제품을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발생한다. 때로는 디자이너가 밤을 새워 최소한의 자원만을 활용해서 패키지를 디자인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기도 하고, 기업은 브랜드 이익의 일부를 착한 제품을 만드는 일에 투자해야 하기도 한다. 마음이 조금만 불편하면 좀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도 있고, 눈 한 번만 질끈 감으면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도 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는 오로지 나의 의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바로 착한 사람만이 착한 디자인을 할 수 있고 착한 브랜드를 만들 수 있다는 재미있는 사실이다.
*이 곳에 실린 모든 사진들은 제가 직접 촬영한 사진들입니다. 사용 시 출처를 밝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