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사과에 대한 단상 - Life Ver.
"OO님의 취미는 뭐에요?"
사람을 어색해 하는 내게, 취미를 묻는 질문은 상대방과의 첫 만남에서 대화를 이어나가기 좋은 도구 중 하나다. 운 좋게도 상대방의 취미를 내가 잘 알고 있다면 훨씬 더 쉽게 친해질 수도 있다. 상대방 취미에 대한 이야기가 사그라들 때면, "I'm fine thank you." 뒤에 자연스레 붙듯 그럼 "잉기님의 취미는 뭐에요?"하고 되물어 보시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책 사기요. 읽는 건 아니고요."
책 사기가 내게 습관이 된 게 정확히 언제부터였을까. 기억을 되짚어 보면 아주 오래전은 아니고, 약 5년 전 즈음 되는 것 같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 지는 생각해봐도 정말 모르겠지만.
한두권씩 책을 모은 뒤로 책 사모으기는 취미가 되었고, 그렇게 사모으다 보니 5년 동안 600만원 이상을 책에 써버렸다. (이렇게 돈 썼다는 것을 알려주는 알라딘께 감사를. 물론 찐 독서가 분들 사이에서는 명함도 못 내미는 금액이다) 이제는 책 사기가 일종의 루틴이 된 듯하지만, 아직도 "왜 그렇게 사세요(buy)?"고 물으면 "책이 좋아서요." 라고 변명대답한다.
책을 좋아하고 책을 즐겨 사지만, 모든 사람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혹은 책을 읽어야만 성공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인 중에 나보다 책을 덜 읽거나, 아예 읽지 않아도 훨씬 더 깊고 넓게 사고하며 잘 사시는 분도 많으니. 게다가 (적어도 내 경우에는) 책읽기가 대단한 행위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심심할 때 할 수 있는 하나의 행동, 이를테면 그냥 누워서 유튜브 보기 같은 거랄까.
최근(이라기엔 조금 철 지난 이야기긴 하지만) '심심한 사과' 논란이 있었다. 물론 '심심한 사과' 정도는 자주 사용되는 말이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진심으로 사과'라는 표현을 쓰는 게 적어도 UX라이팅 관점에서는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더 많이 사용되는 어휘를 사용해서 의미를 빠르고 명확히 전달하는게 맞다고, 특히 인터넷/모바일 환경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점점 더 많은 글이 스크린 위에서 쓰여지고 읽힌다. 심지어 이 글도 마찬가지고. (글의 스타일 상 브런치는 약간 예외성이 있는 편이지만) 이런 데서 항상 직접적인 어휘만을, '심심한'보다 '진심으로'가 맞다면 '심심한'이 서 있을 자리는 어디가 될까.
이런 생각 끝에 그래도 '심심한'과 그의 친구들이 자유롭게 서 있을 수 있는 곳은 '그래도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편집자와 원만한 합의만 된다면) 책은 작가 마음대로 어휘를 사용해도 되는 세상이니까.
개인적으로 '오롯이', '호젓하게' 처럼 외시옷받침이 있는 단어의 어감을 좋아한다. 하지만 빠르고 명확한 의미 전달이 목적인 온라인 상의 글이나 영상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친구들이다. 이런 친구를 자주 만나기 위해서라도, 이들이 살 집을 마련해주기 위해서라도 책을 자주 사고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책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