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쓰기
차오르는 화를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는 대신, 핸드폰을 열어 메모장을 켠다. 나 아닌 타인을 재우는 일, 이것이 이렇게나 힘든 일이라는 것을 누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누군가에겐 관심밖의 문제이고,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응당 알고 있을 이 고통을 어떻게든 설명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은 왜일까. 나의 고통을, 이 미칠 것만 같은 심정을 텍스트로 옮기고픈 도전의식, 아니면 미주알고주알 일파만파 고발심리일까. 그리하여 위로받고 싶은 걸까. 아니면 시간이 지나 지금의 이 심정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게 될까 봐 왠지 모를 아쉬움이 생겨 그러는 것일까. 불을 끄고 침대에 눕혀 재우기 시작한 지 40분이 넘어갈 무렵, 차오르는 화를 삼키며 분풀이용 기록을 시작한다.
지금 이 순간도 아이는 등을 긁어달라 다리를 주물러달라 보채어, 왼손으로 등을 긁고 남은 손으로 핸드폰 자판을 치며 대상 없는 고발장을 쓰고야 만다.
때에 따라 아이를 재우는데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과 솟구치는 화의 크기는 제각각이지만 주목해야 할 사실은 2016년 3월 첫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8살이 된 지금까지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올해 5살 난 동생이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키며 고통의 시간을 이어 달리고 있다. 꼬박 만 7년 동안 밤에 아이를 재워야 하는 흑마법에 걸려있는 셈이다. 요즘 둘째의 난이도가 무슨 의대입시반 수준이어서 첫째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며 대체 이 아이는 왜 이런 것일까 고심하던 와중에 그 옛날 메모장에 써놓은 기록을 찾았다. 첫째가 세네 살 무렵이었으려나. 밤 11시까지 잠들지 못하는 아이를 차에 태워 목적지 없이 강변북로를 달리며, 카시트에서만 잠이 드는 요상함에 대해 남겨놓은 것이었다.
육아의 맹점은 이런 고난의 시기조차 스스로를 탓하게 되는 잔인함에 있다. 수면교육을 실패하여 아이뿐 아니라 온 가족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분노의 저변에 방수천막처럼 얇고도 튼튼하게 깔려있다. 그때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끈기 있게 울어대는 아이에게 지지 말고, 이동폭력 고발로 경찰이 진압하는 상상을 뛰어넘고 견디었어야 했는데. 혼자 방에서 스스로 잠드는 방법을 일찌감치 심어주지 못한 자책이 나를 더 옥죄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의 기질마다 다르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지만 내가 그 기질을 만든 것 같은 자책감까지 지울 수는 없다.
신기한 것은 그 난리를 피우면서도 아이가 일단 잠들고 나면 고충의 감정이 솜사탕 녹듯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일순간 세계는 평화로워지고, 나는 고요해지고 심지어 거룩해진다. 그저 힘들었다는 동사 하나만 남기고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역사 속으로 기록도 없이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리고 잊는다. 그리고 다음날 밤이 되면 고통은 마치 처음인 양 반짝 눈을 뜬다. 매일 새 심장이 돋아나 매일 쪼이는 아픔을 겪어야 하는 신화 속 주인공도 아니고, 육아는 참으로 삶을 경이롭게 해 주는구나.
침대분리고 방분리고 뭐고 그저 아이가 원할 때까지 옆에서 같이 잠을 잘까. 중학생이 되든 고등학생이 되든 언젠가 내 곁을 떠날 테니, 그때는 같이 자자고 해도 거부할 테니 대략 10년만 더 옆에 끼고 잘까 생각도 들다가도, 말이 10년이지 영원과도 같은 시간 아닌가. 아이를 재워야 나의 세상이 열리는데, 나만의 세상을 꿈꾸는 것은 기혼 유자녀 여성에게는 유토피아와 같은 실체 없는 욕망에 불과한가, 오늘도 고심하며 나의 시간을 보낸다. 언젠가 누구도 재울 필요가 없어지는 날이 도래하면 그때는 어떤 기분일까, 이 글을 꺼내어 보며 추억에 잠길 수 있게 잊지 않게 남겨 보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