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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왑 Jan 22. 2020

비 오는 날, 읽어보세요

아주 늦은 감상문 영화 "클래식"

50년이 지나, 2003년 겨울에 내린 소나기



영화 "클래식"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그러나 이 작품에서 생각보다 조인성은...




    다른 계절과 구별되는 겨울만의 대표적인 특징은 "눈"이다. 푸른색 바탕에 새하얀 결정이 나풀거리며 내려올 때, 그리고 그 결정들이 수북이 쌓여 까만 바탕을 하얗게 지워나갈 때엔 이유 모를 특별한 느낌을 받는다. 발자국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내주며 그들이 인사를 건넬 땐, 그 특별함이 반가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소리를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들을 수 있는 영광이 있다면, 반가움은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으로 조금씩 스며들지 모른다. 춥지만 따뜻한 겨울은 그렇게 다가온다.


    그러나 2020년의 겨울은 유독 비가 많이 내리고 있다. 예년과 다른 기후가 그 원인이라고 하는데, 사계절에서 겨울만이 부릴 수 있는 재주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쉬움이 가득하다. 이처럼 실제로 겨울이 따뜻하다면 우리는 역설적으로 따뜻한 감정을 못 느낄 수도 있다. 따뜻한 기후임에도 오히려 비로 인해 추운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눈바람이란 단어는 안 써도, 비바람이라는 단어는 흔하게 쓰이지 않는가. 요컨대 "비"는 "눈"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임에도, 정서적으로 동일한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그런데 때로는 그 느낌 덕분에 비와 함께 지나친 순간순간들이 아찔하게 기억에 남기도 한다. 비를 피하는 순간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서로 전개될 때가 대표적이다. 예상치 못한 비는 불쾌하고 짜증 나지만 예상치 못한 우산이나 예상치 못한 동반자는 유쾌하고 설레기 때문이다. 우연히 나타난 그것들이 적절히 엮어져서 필연적인 것으로 규정되는 그 순간, 그 판타지 같은 순간을 왠지 비는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 겨울이라고 다를 소냐. 2003년 1월 개봉한 영화 "클래식"이 따뜻함을 전해줄 수 있는 이유다.



스포일러 주의


    

    파헬벨의 캐논과 함께 영화 클래식은 클래식한 소재들인 무지개, 비둘기, 먼지 쌓인 수납공간으로 서사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지혜는 자신의 어머니(주희)가 학창 시절 아버지와 주고받았던 러브레터를 발견한다. 때마침 비둘기가 드나들던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그 편지들이 흐트러진다. 지혜가 편지에 적힌 생소한 이름(준하)을 확인하면서 오랜 시절 혀있던 편지에 담긴 스토리가 클래식한 화면으로 전환되어 펼쳐진다.  스토리 속엔 영화 속에서 지혜가 한 첫 대사의 비밀이 담겨 있었으며, 이것이 비단 엄마 주희의 사랑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딸 지혜의 사랑으로까지 연결되면서 환상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 지혜의 첫 대사
옛날 어린 시절 강 위에 떠 있던 커다란 무지개를 본 적이 있다. 그때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지개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야. 사람이 죽으면 무지개 문을 지나서 천국으로 가는 거란다.


    멜로는 현실에서 벌어지기 어려운 것들(소재, 내용, 심지어는 외모까지)을 이용해 사람들의 환상을 채워주는 것이 특징이다. 비현실성과 우연성이 태생적 성격이라는 것인데, 그 정도가 과하면 불편함이 생기는 문제점이 따른다. 정도라는 것이 참 모호하므로 가끔은 무언가에 기대서 관객들을 만나 이를 해결할 때도 있다. 물론 그럴 때에도 지적은 따른다. 새롭지 않아 참신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만큼 멜로가 적절한 정도의 신선한 환상을 일으키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인데, 영화 "클래식"은 숙하지만 흔하진 않은 소설인 "소나기"를 차용해 이를 해결한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부터 너무나 어렵지 않게 이 소설이 떠오르며 수동적 감상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때부터 능동적 "읽기"가 시작되고 소나기의 본질인 "비"에 주목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비는 아주 핵심적인 소재이다. 영화에 나온 두 커플 간 연애의 결정적인 장면엔 항상 비가 함께 한다. 주희와 준하가 급격히 가까워지게 된 계기는 비로 인해 강물이 불어 섬에 갇혔기 때문이다. 한편 비를 피해 서둘러 뛰다가 다친 주희를 준하가 업어주면서 서로에 대한 호감을 직접적으로 확인한다. 이별 후에는 준하가 주희를 붙잡기 위해 그녀 집 앞에까지 찾아가는데 이때에도 서로는 비를 맞고 있다. 지혜와 의 장면에서도 비의 역할은 매우 크다. 지혜가 우산 없이 홀로 캠퍼스에서 비를 맞고 있을 때 상민이 우연찮게 나타나 옷으로 비를 막아주며 같이 뛰어가는 장면에서 둘의 설렘은 증폭된다. 상민이 우산 없이 등장한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된 주희는 다시 한번 비를 맞으며 상민을 찾아가고, 그 사랑은 이뤄질 수 있었다.


공갈... 안 공갈... 공갈... 안 공갈...
# 다친 주희를 준하가 업어주며
주희: 저 무겁죠?
준하: 아뇨. 하나도 안 무거운데.
주희: 저 몸무게 많이 나가요. 밥도 많이 먹고.
준하: 에이. 걱정 마세요. 주희 씨 정도면 업고 서울까지라도 갈 수 있어요.
주희: 공갈...
준하: 안 공갈
주희: 공갈...
준하: 안 공갈 (서로 웃는다)


비맞는 모습이 매우 행복해보인다
# 상민의 마음을 확인한 지혜가 상민을 찾아가서
상민: 우산이 있는데 왜 비를 그렇게 흠뻑 맞았어?
지혜: 이건 제 우산이 아니니까요. 돌려드리려고 왔어요. 매점에다 두고 가셨잖아요. 우산이 있는데 비를 맞는 사람이 어디 저 하나뿐이에요?
상민: 가지 마... 다 알고 있잖아... 내 마음... 이제 다 알아버렸잖아...


    특히 주희와 준하 장면에서는 배경, 인물의 성격 등이 어우러져서 소설 "소나기"의 두 주인공을 직접적으로 연상하게 만든다. 감독 스스로도 소설 소나기에서 여주인공이 죽지 않았으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하며 시나리오를 썼다고 했을 정도였으니, 이러한 연상은 관객들에게 영화를 "읽어보라"는 권유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읽어 가다 보면 소설의 글이 마치 영화라는 현실에 펼쳐진 듯해, 우연적이지만 현실적인 것 같은 환상을 심어준다.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소재나 내용들로 사람들의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요즘 멜로의 경향이었단 점을 고려할 때, 소설 "소나기" 그리고 비라는 일반적인 소재로 현실적 우연성을 구연한 영화 클래식은 적절한 정도의 신선한 환상이라 하기에 충분하다.


소설 소나기 속 장면이 연상된다


     이렇게 구현된 현실성 덕분에, 진부할 수 있는 일편단심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꾸며주는 여러 다양한 소재들이 불편하지 않고 아름답기만 하다. 세대를 넘어 주희-준하의 사랑 이야기를 지혜-상의 사랑 이야기로 연결해주는 소재들이 대표적이다. 예컨대, 괴테의 글귀나 반딧불이, 목걸이 등이 최종적으로 그 두 커플을 연결해준다. 특히 목걸이의 경우, 주희가 준하에게 준 것을 준하의 아들인 상민이 물려받아, 다시 주희의 딸인 지혜에게 전달해주는 경로가 드러난다. 이때, 목걸이가 주희에 대한 분신인 것처럼 준하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를 지켜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지고지순한 사랑과 그에 따른 희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 대한 끝없는 배려가 드러나는 장면으로, 목걸이는 멜로의 클래식한 구조를 보여줌과 동시에 사랑의 지속성이라는 의미도 자아내는 소재이다. 클래식해 보이는 영화임에도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소재들의 개성 덕분인 것 같다.


주인을 다시 찾아온 목걸이


    그 외에도 순수한 사랑의 진정성을 높인 것엔 배우들의 연기력, 배경음악, 섬세하게 묘사된 60년대의 정경, 그리고 30년의 터울을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연출 등 여러 요소들이 거론될 수 있다. 일편단심의 조승우와 1인 2역을 훌륭히 소화한 손예진은 가히 데뷔 초반부터 솜씨가 남달랐음을 깨닫게 한다. 시작은 알린 '캐논'부터 끝을 장식한 '사랑하면 할수록'까지, 클래식과 대중가요를 넘나든 배경음악은 시기적절하게 감동을 더해준다. "나 때는 말이야"로 많이 들었던 그 당시 고등학교 모습들도 간간히 웃음을 자아내며, 두 얘기를 부모-자식 간 연결이 아닌 시대를 불문한 커플 간의 연결로 만든 연출은 감탄스럽기 그지없다.

 

조승우의 섬세한 연기에 놀랄 수밖에 없다


날씨를 빼놓고선 얘기할 수 없는 영화 "클래식."

이 영화가 개봉한 2003년 겨울의 날씨는 어땠고, 관객들은 어떤 날씨 속에서 영화를 보러 왔을까.

그 관객들은 자신이 어떠한 날씨 속에서 영화를 봤는지는 기억 못 해도, 비가 오는 날씨에는 이 영화가 꾸준히 떠오르지는 않았을까.

비도 잘 오지 않는 겨울에, 소나기를 2시간 남짓 맞는 특별한 경험을 했으니까 말이다. 


비가 오는 날, 한 번 더 "읽어보고픈"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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