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hite Gold Jul 27. 2020

예술은 아무나...

하는 거지 뭐

나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너무 유연해서 ‘고무’라는 별명을 가지고 살았다. 그리고 그런 나의 모습(아기 때 기저귀를 갈 때면 두 발이 양쪽 귀 옆에 붙어 있었다나)을 본 엄마의 친구 분께서 “크면 꼭 무용을 시키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 친구 분이 운영하시는 무용학원에서 미취학 아동 시절부터 한국무용과 발레, 현대무용을 배웠다. 지금도 무슨 음악이든 나오기만 하면 그 음악에 맞춰서 춤추기를 즐긴다. 그래서 나의 꿈은 무용가였고,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돈을 벌지 못한다는 어른들의 걱정스러운 말씀에 대응해 드리기 위해 “대학교 무용교수”라는 말로 내 꿈을 설명하곤 했었다. 콩쿠르에 나가 상도 받고 각종 행사에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던 어린 나에게 우리 아빠는 “돈만 들고 돈은 못 버는 무용을 왜 하려 하느냐”며 핀잔을 주시고, 캐나다로 원정공연을 보내려던 엄마와 다투시는 등 서서히 나의 꿈을 무너뜨리셨다. 아빠의 비협조(?)가 문제였는지, 뚱뚱해지고 못생겨진 몸과 마음의 사춘기가 문제였는지, 어쨌든 내게도 침체기가 찾아왔고, 무용이 재미가 없어지는 시기도 찾아왔다. 그 무렵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즈스탄이라는 나라로 온 가족이 이민을 가면서 나와 무용가의 꿈은 그렇게 영영 멀어졌다.  

  

종이인형과 코디 스티커를 끼고 살던 키르기즈스탄의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이태리로 의상디자인을 공부하러 유학을 가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림에는 자신이 없었지만 의상디자인에 대한 열망이 컸기 때문에 그런 스킬 정도는 다른 능력으로 충분히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어느 여름 한국에 잠시 나와 있을 무렵 출석했던 교회에서 여름 성경학교 포스터를 그리게 되었는데, 예쁜 한글을 자주 쓰지 않고 살았던 내가(외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으니!) 크레파스로 커다란 색지에 몇 글자를 적는 순간, 주변에서는 “그게 대체 뭐냐”며 비웃음이 시작되었다. 그저 생각보다 글씨를 어눌하게 쓰는 내가 신기해서 보인 반응이었겠지만 정말 머쓱하다 못해 너무 창피해서 그 색지를 찢어버리고 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글씨는 잘 못 쓸지라도 웬만한 꾸미기는 잘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나의 디자인에 대한 꿈은 영영 사라졌다. “나는 꾸미기에는 젬병이야”라는 생각만 남기고.     


(위 사진은 제가 아닙니다)

다시 조금 더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내가 한국무용을 배울 때 북과 장구, 소고 연주도 배웠더랬다. 정확히는 북춤, 장구춤, 소고춤이라 할 수 있겠다. 타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출 때의 그 신명남이란!! 그런 영향에서였는지 키르기즈스탄에서 다니던 교회 오빠로부터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고 “여자애가 드럼을?”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즐기며 어깨가 으쓱거려서 나름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주말 예배 때마다 찬양단에서 드럼 연주도 하고 나보다 더 어린 친구들에게도 드럼을 가르쳐 줄 무렵, 피아노나 드럼처럼 부피가 커서 들고 다닐 수 없는 악기 외에 기타나 색소폰처럼 어디든 들고 다니면서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배워보고 싶었다.


그때 생각한 것이 플룻. 나는 없는 살림에도 자식이 하고 싶다 하면 무엇이든지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엄마의 사랑으로 중고 플룻을 사서 일주일에 2번씩 젊은 음대 교수로부터 개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키르기즈스탄에는 학원이란 개념이 아예 없었고 무엇이든지 개인적으로 배우기 위해서는 학교 선생님 또는 대학교수로부터 1대 1 과외를 받았고 레슨비도 굉장히 저렴했다) 빨리 예쁜 소리를 내며 예쁘게 연주하고 싶었던 마음과 달리 플롯 연주는 세상 어려웠고 열심히 연습하지 않는 나의 모습에 점점 더 실망하시던 그 젊고 무미건조하고 직설적인 교수님께서는 “내가 가르치는 8살짜리 한인 선교사님 자녀는 너와 같은 시기에 배우기 시작했는데 벌써 이런 곡도 연주하고 저런 곡도 연주한다.”며 매시간 비교를 하기 시작했다. 어린애가 어찌나 빨리 배우는지 놀라울 따름이라며 정말 놀란(?) 마음에 내 앞에서 그 어린 친구 얘기를 하시는 것은 이해가 되었지만 한참 어린 친구와 비교당하는 마음은 상처 받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결정적인 한마디. 내가 교회에서 드럼 연주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교수님께서는 ”아, 네가 그래서 박자감은 좋은데 음감은 없구나! “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세상에.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너무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교수님을 보니 플롯 연주를 하고 싶은 마음이 정말 조금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또 나의 플롯 연주도 바이.    


예능에 최적화된 사람(아빠는 기타와 건반 그리고 색소폰 연주로 밥벌이를 하시던 예술가셨고, 엄마는 무려 대학에서 공예과를 나오셨다)이라고 굳게 믿었던 나인데 무용, 그림, 음악으로부터 멀어진 나는 어느새 스스로 “예술성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나”라는 생각을 뿌리 깊게 가지게 되었다. 무엇이든지 하려면 괜히 긴장되고 “너는 못해, 못 하는 거 알잖아”라는 목소리를 스스로 마음속에서 찾아내서 굳이 되뇌었던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안다. 그런 목소리는 개나 줘버려야 한다는 것을. 아무나 예술을 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 무. 나 예술을 한다”라고. 그래서 꿈꾸는 것이 있다. 무려 3가지나. 우선 나중에 퇴직을 하게 되면 인도에서 요가 3개월, 남미에서 탱고 3개월, 중국에서 간화 태극권 3개월, 유럽 또는 미국에서 자이로키네틱을 3개월 동안 배우고 오리라. 아무것도 안 하고 춤만 추다 오리라. 기회가 된다면 그 시절 내가 보고 느끼고 배운 점들을 책으로 펴내도 좋고. 먹고 자고 춤추고. 얼마나 행복할까. 두 번째로 의상디자인을 꼭 배워보려 한다. 복장학원이든 한복을 가르쳐 주는 곳이든 어디든 옷을 디자인하고 패턴을 뜨고 박음질 해 옷을 만들어내는 것. 내 꼭 한번 해보리라. 마지막으로 우쿨렐레를 배우려 한다.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는 악기. 타악기와 건반악기, 그리고 관악기는 조금씩 경험해 봤으니 이제 어디 한번 현악기를. 요즘 독학으로도 많이들 하던데, 기회가 된다면 하와이에 3개월 살면서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위에 세 가지를 이루고 나면 지난 시절의 ‘예술과는 거기가 먼 나’보다는 ‘예술적인 나’로서 기억하기 쉬울 듯하다.    


그리고 모두에게 말해주겠다. 

예술은 아무나 한다. 

나 같은 사람도 하니까.    


P.S : 참고로 우리 아빠와 교회 언니, 오빠들, 그리고 플룻을 가르쳐주시던 교수님. 당신들을 원망하지 않아요. 어떤 나쁜 의도를 가지고 그런 반응을 보이 신건 아니잖아요? 나는 그저 은연중에 당신들처럼 행동하지 않도록 노력 또 노력하겠습니다. 


#예술 #무용 #춤 #음악 #플륫 #드럼 #그림 #디자인 #우쿨렐레 #요가 #자이로키네틱 #탱고

작가의 이전글 채식 위주의 식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