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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기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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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Aug 17. 2023

36. 독박육아

요즘 독박육아로 연일 신기록을 세우고 있다. 남편의 출장 때문이다.

화수목금/토일월화수목금토일/월화

각각 3박 4일, 8박 9일, 1박 2일짜리 출장이 연이어서 있다. 15일간 아기를 혼자 봐야 한다. 지난주 목요일은 태풍, 이번주 화요일은 광복절로 어린이집을 못 보내는 날도 있었다. 어린이집을 못 보내면 뭐가 문제냐고? 밥. 그놈의 밥이 문제다. 삼시세끼 내가 다 만들어서 차리고 먹이고 치우는 일이 가장 고되다. 어린이집을 가는 날에는 아기를 보내놓고 장도 보고 반찬도 만들 여유가 있는데 안 가는 날에는 아기를 재우고 난 뒤 지치고 힘든 저녁시간에 국과 반찬을 끝내놓아야 한다. 어린이집을 안 가는 날이 15일 중 6일이었으니 극기훈련이라도 하는 기분이다.




아기를 계획하기 전,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 이런 거였다. 남편은 노동시간이 길어도 너무 긴 직장이다. 이런 직장이 노동법에 걸리지 않는다니 진짜 기함할 일이다. 남편네 직장 사람들은 그래도 일한 만큼 돈으로 준다며 괜찮다고 생각한다는데 전혀 괜찮지가 않다. 아마 이직을 하지 않는 이상 이렇게 길고 고된 노동으로 아마 크고 작은 고질병들을 안고 살아갈게 분명하다.


그래도 부부의 힘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라고 희망회로를 돌렸다. 마침 나는 유급이나 무급 휴가를 길게 쓸 수 있는 직장이기도 했고 여차하면 남편이 짧지만 유급육아휴직을 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큰 착각이었다. 일단 나는 야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직장인 대신 남편에 비해 월급이 턱없이 적었다. 물가가 급격하게 오르는 요즘의 현실에서 내 월급으로 세 식구 생활비도 벅찰뿐더러 우린 대출도 어마어마했다. 내가 홀로 육아가 힘들어도 남편이 휴직을 쓰란 말을 둘 다 제대로 못 하고 있는 상황인 거다. 사실 얼마 전 내가 1년의 유급육아휴직이 끝나고 무급휴직으로 들어서면서 한번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노동, 노동의 문제다. 우리에겐 적절한 노동시간과 충분한 육아휴직수당이 필요한 거였다. 다른 것은 다 부차적인 문제다.




한 달 전, 동생이 워홀을 떠났다. 나의 독박 육아는 남편의 긴 노동시간보다 동생의 부재가 더 새로운 국면으로 다가왔다는 게 맞을 거다. 왜냐하면 동생은 우리 부부와 어린이집을 제외하고 우리 아기의 돌봄에 가장 지원을 많이 해준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남편 없이 산후조리할 때 식사를 챙겨주고 새벽수유를 도와주거나 이번처럼 주말 육아가 힘들 때 아기를 데리고 같이 외식을 나가주거나 하다못해 내가 설거지하는 동안 아기를 봐주는 건 그 당시에도 무척 고마운 일이었지만 동생이 떠나고 나니 그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물론, 나도 시터를 써보기는 했다. 이미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으니 어린이집 하원 후부터 봐주는 시간제 시터님이 아기 돌봄과 아기와 관련된 약간의 집안일을 해주셨다. 그런데 문제는 아기는 시터님이 있어도 결국 나에게만 착 달라붙었다. 동생은 신생아 때부터 자주 보던 사람이라 그런지 내가 집안일을 하고 있거나 잠깐 동네 마트에 다녀와도 아기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하루 3시간 잠깐 있다 가시는 분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물론 이분도 우리 부부가 다시 외벌이의 길로 들어서며 더 고용할 수는 없었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는 주변에 "너만큼 독박육아 하는 사람을 못 봤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주변엔 상황이 어려울 때 손 벌릴 수 있는 양가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남편이 집에는 들어오는 직장에 다니지 않나. 남편의 육아 참여도가 낮아 고민하는 것과 아예 부재중이어서 고민할 거리조차 없는 건 다른 문제일 것이고. 그래서 요즘엔 속으로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는 직장, 주말엔 쉬는 날을 가진 남편이었으면 좋겠다' 하고 한탄하곤 한다.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면 적어도 설거지쯤은 해주고 얼굴 보고 이야기라도 해주겠지. 주말에 쉬면 적어도 내가 문 닫고 화장실에서 할 일을 할 수 있겠지 하고.


이렇게 살다 보니 부부의 힘만으로 아이를 키운다는 건 그냥 불가능의 영역에서 숨이 차도록 허우적거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부부 둘만의 힘으로 키울 수 없다. 삶의 이렇게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행복해지기란 어렵다. 그저 아기가 크는 일이 대견하고 아기가 소중한 존재인 것과는 다른 일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 것이다. 여자들이 아기를 낳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나는 우리 아기를 계획할 때에도 큰 도전이라 생각하며 결정했지만 둘째를 낳는 건 아예 고려 대상에도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우리 아기를 키우는 일이 도전이 아니라 한계를 시험하는 일같이 느껴진다. 생존하는 일에 이렇게 큰 부담을 느껴서는 안 된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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