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개월 아기
오늘 드디어 남편이 돌아왔다. 그러나 안심도 잠깐 이번엔 다음 주 목요일부터 또 일주일간 사라질 예정이다. 매우 갑갑스럽지만 일단은 미리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 건강을 찾고 남편이 와야 할 수 있는 일들을 먼저 해둬야지.
지난주 갑자기 안경다리가 부러졌다. 작년에 산 안경은 아기가 안경다리를 5번이나 부러뜨려서 더 이상 수리를 맡기기 포기했고 그전에 맞춘 예비안경을 쓰고 있었다. 이제 그 예비안경까지 부러진 거였다. 이번에는 아기가 한 것은 아니고 너무 오래된 안경이라 육아하며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수명을 다 한 듯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안경이 부러진 시점이 아기 하원 20분 전. 안 보이는 눈으로 겨우 콘택트렌즈를 찾아 끼우고 그것이나마 있는 게 다행이라며 얼른 아기를 데리러 갔다. 남편이 없으니 아기를 안고 안경점에 들어가서 시력 측정은 작년에 한 것으로 대체하고 후다닥 안경알 가격대를 고른 다음 수많은 안경테 앞에 섰다. 내가 좀 힘들어 보였는지 안경점 직원은 3만 원짜리 안경테 중에서 아기가 잡아당겨도 유연해서 안 부러지는 안경테를 골라줬다. 그의 탁월한 선택에 감탄하며 얼른 안경테를 고르고 무사히 안경을 맞출 수 있었다.
안경다리 사건이 있고 나니까 어서 미용실에도 가고 싶었다. 올해 초에 미용실을 간 뒤에 여유가 없어서 한 번도 못 갔다. 하지만 남편이 없는 시기에는 미용실을 갔다가 아기에게 급한 일이 생겨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올까 봐 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시기가 꽤나 길었고. 그래서 더 이상 남편에게 예측불가능한 일이 생기기 이전인 돌아오는 날에 예약을 잡았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턱선까지 오는 단발로 자르고 펌도 하고 나니 속이 다 시원했다. 머리를 하고 돌아와서 남편이 또다시 나의 독박육아 일정이 앞으로 당겨졌음을 알렸고 역시 오늘 머리를 하기 정말 잘했다.
아기는 남편이 없는 동안 다시 무시무시한 밥테기가 왔다. 김과 치즈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고 가뜩이나 독박육아와 살림을 혼자 꾸리고 있는 상황에서 너무 스트레스가 심했다. 내 밥이 넘어가지도 않아서 일주일 만에 몸무게가 2kg이 빠질 정도였다. 결국 해 먹이는 걸 포기하고 막판엔 국과 반찬을 사다 먹였다. 그것 역시 잘 먹지는 않았지만 스트레스 강도가 훨씬 줄었고 아기에게 부정적인 감정이 드는 것도 나아졌다. 억지로 먹일 수는 없으니 안 먹으면 질질 매달리지 않고 치우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래도 밥을 먹이는 일에 온 신경이 집중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아기가 건강하게 성장했으면 좋겠으니 밥 세수저 먹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니까.
하루종일 아기와 붙어지내며 아기의 놀이 패턴을 관찰하다 보니 문득 시기가 지나서 아기가 더 이상 가지고 놀지 않는 장난감들이 많다는 걸 발견했다. 이사 오면서 한 차례 정리했는데 미련이 남아서 못 버리던 것들이 거실 환경만 어지럽힌 채로 있던 거다. 그런 잡다한 것들을 걷어내고 나니 아기가 놀만한 것들이 많이 없었다. 이맘때쯤 아기들은 뭘 하고 노나 싶어서 브이로그 몇 개를 찾아보고 장난감 몇 종류를 주문했다.
블록은 아직 크기가 작아서 아기가 쌓기 어려워하는 것도 있고 잘 쌓아지지 않아서 아기가 못 쓰는 것도 있어서 어린이집 사진에서 보이던 걸로 하나 주문했다. 꼭지 퍼즐이라는 것도 있어서 주문해 봤는데 인터넷상의 아기들이 빠른 건지 우리 아기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건지 그림은 좋아하는데 끼우는 건 하지 못했다. 원목 실로폰은 개중 아기가 가장 좋아하고 흥미가 있었는데 내가 듣기엔 약간 음정이 안 맞고 채를 치는 방법을 잘 알려줘야 할 듯하다. 그리고 한 달 전부터 미끄럼틀을 사고 싶어서 벼르는 중이다. 가장 사고 싶은 건 아기가 좋아할 만한 작은 공간과 핸들이 있는 타요 미끄럼틀인데 당근에도 매물이 잘 안 나오고 새것을 사기엔 비싸서 망설이고 있다. 하지만 아기가 미끄럼틀을 꽤나 좋아하고 아직도 더워서 밖을 잘 못 나가니 타요 미끄럼틀을 사줄지 다음 주 중엔 결정해야겠다.
요즘 아기가 제일 좋아하는 장난감들은 역시 노래가 나오는 것들이다. 영상을 보여주지 않다 보니 내가 율동과 노래를 같이 해주는데 그때면 몸을 흔들흔들하고 박수도 치고 요즘에는 내 동작의 많은 부분을 따라 한다. 머리어깨무릎발 노래를 불러주면 예전엔 머리만 가리켰는데 이제는 발까지 손이 내려오는 발전을 했다. 산토끼 노래도 율동을 따라 하려고 하고 다른 노래들도 율동을 붙이면 더 좋아해서 자꾸 이것저것 개발하게 된다.
의사표현 방법이 많이 늘었다. 이제 긍정과 부정표현을 할 줄 안다. "응"이라는 말은 하고 "아니"라는 말은 아직 못 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언어표현과 몸짓표현을 섞어 쓰는 것이다. 과거의 일을 물어봐도 응, 아니의 범위에서 대답할 수 있는 편이다.
어린이집 물놀이 재미있었어? - 응!
맘마 더 먹을래? - (도리도리)
까까 먹을래? - 깎까
이런 식으로 의사 표현을 할 수 있게 됐다.
언어표현이 늘듯 하면서도 제자리걸음 같기도 하다. 예전에는 두음절 단어도 잘 말했는데 요즘에는 아빠 이외의 단어는 앞 글자 하나만 이야기한다. 엄마도 "엄-"이고 치즈도 "치-"다. 그런데 울 때는 엄마라고 명확히 부르면서 안기려고 한다. 즐거울 때는 아빠아빠 하고 울 때는 엄마엄마 하는 것도 스트레스 포인트이긴 하다.
자기주장이 강해졌다. 무엇을 하자고 이야기하면 일부러 하기 싫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좋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전에는 일상행동들은 그냥 하자고 하면 하는 거였는데, 이제는 싫다고 할 때 하려고 하면 크게 반항한다. 그래서 요즘 설득을 하려고 노력하는데 말귀를 어느 정도 알아듣다 보니 아기의 흥미를 끌면 설득이 먹히곤 한다. 예를 들어 기저귀를 입기 싫어하는 아기에게 "봐봐 엄마도 (속옷) 입고 있지? 이건 어른 거고 아기는 아기 거 입어야 해." 하는 식이다. 대부분은 몇 번씩 물어봐서 하고 싶을 때 하게 해주는 편이지만 병원 방문해야 할 시간이 촉박하거나 기저귀 입히는 것, 늘 하기 싫어하는 양치는 그냥 억지로라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 등을 대고 드러누워서 떼를 쓰는 건 사라졌다. 훈육이 먹힌 건지 아니면 그것도 지나가는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뭘 하고 싶다고 표현해서 내가 거절하거나 알아듣지 못하면 짜증을 내고 울기는 하지만 그 울음이 길거나 과하진 않다. 요즘엔 내 거절도 전에 비해 빠르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얼른 주의를 돌리면 울지 않고 넘어가는 일도 종종 있다.
사람의 부재를 인식한다. 그걸 대상영속성이라고 하던가? 아빠가 출근을 해도 이건 영영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저 쪽으로 나갔고 돌아오지 않은 것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책을 읽거나 아빠 사진을 보거나 아빠와 영상통화를 할 때면 현관문 쪽을 가리키면서 아빠는 저기로 떠났다는 표현을 한다. 내가 화장실을 가는 것도 어디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볼일을 보러 간 것뿐이고 곧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란 것도 안다. 화장실에 가서 여전히 문을 열고 일을 봐야 하지만 이제 내가 가도 문 앞에서 서성이지 않고 쓱 내쪽을 보고 사라지거나 필요할 때 나를 찾으러 온다.
도구를 어떻게 사용해야 효율적 일지 관찰하고 행동에 옮긴다. 넘어진 의자의 어느 부분을 잡아야 세울 수 있는지, 장난감 구성품이 분리되었을 때 어떻게 끼워야 하는지, 수저로 음식물을 떠서 입으로 넣으려면 어느 부분을 잡고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보고 성공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
몸의 균형을 잘 잡는다. 아기 풀장이나 튜브같이 몸을 넣었다 빼는 것도 넘어지지 않고 한 발로 지탱해서 다른 발을 빼는 것을 할 줄 안다. 바지를 벗을 때도 다리를 한쪽씩 뺄 때 어딘가를 잡지 않고 빼도 넘어지지 않는다. 턱을 넘거나 아기용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잘한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 단차가 있는데 예전에는 조심히 손을 잡고 내려갔다면 요즘에는 그냥 내려가기도 한다. 샤워핸들에 기대지 않고도 엉덩이를 씻기거나 샤워할 수 있게 됐다.
밤잠은 깊어지고 낮잠을 짧아졌다. 요즘엔 7시 반에 눕히면 8시에 자고 7시 반쯤에 기상한다. 예전엔 새벽 6시에 일어나서 하루종일 나를 피곤하게 하더니 이제는 나를 푹 재워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그런데 낮잠은 웬만큼 힘을 빼주지 않고서는 30분 컷 딱 한번 자서 내 체력이 간당간당하다. 실내놀이터에서 한 시간 반을 신나게 놀아야 두 시간 반을 낮잠으로 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