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누구나 세상을 살며 상처 하나쯤 가지고 삽니다. 아쉽게도 세상에 태어난 이상 아이부터 어른까지 상처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남은 나에게 별 관심이 없습니다. 가끔은 가장 가까운 가족조차 무심합니다. 이 상처를 어떻게 위로하면 좋을까요? 어떻게해야 이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럴 때 저는 화가 에바도로 뭉크를 추천합니다. 절망 안에 빠져있다면 가끔은 나보다 더 심한 절망을 격은 사람이 약이 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절망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면서 그래도 저 사람보다 내가 낫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됩니다. 그 순간 밑바닥을 찍고 희망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뭉크의 그림은 그런 의미에서 희망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화가의 그림은 절망적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선 그의 가정사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뭉크, 그는 군의관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 그리고 누나와 동생들 사이에서 유복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이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갑니다. 5세에 어머니가 결핵으로 죽습니다. 몇 년 후에는 어머니 대신 의지하던 첫 번째 누이조차 같은 병으로 죽습니다. 그 몇 년 후에는 다른 누이가 정신병 판정을 받고 병원에서 사망합니다.
가족들의 계속 된 죽음으로 그는 다음은 자기차례라는 생각을 가지며 불안해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불안증에 시달라게 됩니다. 더욱이 어머니가 사망한 후 그의 아버지는 종교에 빠지고 신경질적이고 방탕한 삶을 이어갑니다.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상처가 끊이지 않는 시절이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 <절규>입니다.
이 그림은 광고 및 여러가지 미디어에서 패러디로도 나오는 작품인데요. 현대인들에게 아주 익숙한 그림입니다. 뭉크는 살아 생전 불안증이 심했다고 합니다. 불안한 심정을 남자의 표정에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뭉크의 말에 따르면 그는 어느 해지는 저녁 해안가의 길을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피처럼 붉게 물들더니 비명소리가 자연을 가로지르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더불어 그 비명을 들은 것 같다고 합니다. 뭉크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림 한 점을 그립니다. 바로 유명한 <절규>입니다. 구름은 진짜 피처럼, 색채는 날카로운 비명처럼 그렸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왜 오랜시간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을까요?
제 생각에 관객은 그림과 남자의 표정을 통해서 자신 안에 있던 우울하고 불안한 무언가를 보았을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이던 젊은 날의 가슴 아픈 사연이던 그것은 나만의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는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매우 독특하지만 보편적입니다.
<절규>만큼 불안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작품<사춘기>를 소개합니다.
소녀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앉아있습니다. 제목에 맞게 이 소녀는 아이와 어른의 중간 어디쯤에 있습니다. 앙상한 팔 다리와 연약한 작은체구, 성장 중인 몸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이 작품에는 그녀의 일부로 보이는 검은 덩어리가 있습니다. 만약 이 덩어리가 빠졌다면 매우 평범한 작품이 되었을 것 입니다. 이 덩어리는 사춘기 소녀의 불안, 두려움과 연관있습니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가는 동안 몸도 성장하지만 내면의 세계도 같이 성장합니다. 소녀는 변화된 이후의 삶을 알지 못합니다. 미지의 세계인 그 곳은 불안합니다. 변화란 항상 기존의 것을 두고 새로운 곳으로 향하기에 불안합니다. 우리의 삶은 멈춰있는 듯 하지만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이런 끝없는 변화 속에서 <사춘기>의 소녀도 뭉크도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감정은 현대인들도 많이 느낍니다. 매시간 성장을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불안함과 두려움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소녀,뭉크,현대들은 차이는 있지만 앞으로 가야 합니다. 소녀는 생존을 위해 여인으로 성장해야 하고, 뭉크는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으며, 현대인들은 달려가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불안합니다. 이 그림이 매력적인 이유는 변화하는 존재의 두려움을 잘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 두려움은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기에 이 작품은 좋은 그림입니다.
뭉크의 어린시절, 죽음의 상처는 불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청년시절에 그는 다른 종류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실패한 연애와 사랑은 큰 상처를 남깁니다. 이 절망의 늪에 빠져서 사람들은 시간을 허비하거나 감정을 의미없이 소모하기도 합니다. 뭉크의 연애는 아주 불행했습니다. 여성혐오자가 될 정도로 어마어마했습니다. 막장드라마에 나올 것 같은 불륜, 질투, 이별 ,집착,자살 위장극까지…. 연애의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그는 애인이 쏜 권총에 손가락이 구멍납니다. 사랑의 어두운 면을 모두 겪은 뭉크가 그린 여인과 사랑그림은 매우 어둡습니다.
원제목 <사랑과 고통>입니다. 이 그림은 뭉크가 첫 번째 사랑을 마치며 그린 그림입니다. 뭉크의 첫 번째 사랑은 유부녀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았음에도 뭉크는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어느 날 뭉크의 연인은 이혼을 합니다. 뭉크는 은근히 그녀가 자신에게 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뭉크의 연인은 다른 남자를 만났습니다. 이에 여성혐오자가 될 정도로 뭉크는 큰 실망을 합니다.
이 그림 속 여성은 남성을 흡혈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여자의 하얀 피부색과 남자의 어두운 색감이 대비됩니다. 이 여성이 흡혈을 다 하고 나면 남자는 버려질 것입니다. 피가 빨려들어가는 남자는 고통스러운 듯 몸을 기대고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도 못합니다. 여인을 위해 고통을 희생하는 남자는 바로 뭉크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고통과 불행이 보였던 건지 이 그림은 원작보다 다른 이름으로 더 유명합니다. 바로 <흡혈귀>입니다.
마지막 그림 <마라의 죽음> 입니다. 이 그림은 뭉크가 세 번째 연인과 이별 후 그린 것입니다. 이 연인은 뭉크의 마지막 연인이 됩니다. 그녀는 그에게 집착했습니다. 그를 감시하기도 했고요. 이에 질린 뭉크가 이별을 선언하자 자살위장극을 벌입니다. 그녀의 자살위장극에서 뭉크의 한 손가락이 총에 관통당합니다. 화가에게 손을 잃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왼쪽 손가락을 잃어 다행이 그림을 쭉 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뭉크의 정신은 물 방울없는 사막의 밤처럼 고통스러웠습니다. 그가 그린 <마라의 죽음>은 여자가 남자를 죽인 후 장면입니다. 뭉크가 여자에게 느낀 감정은 불안, 두려움, 분노,증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뿐입니다. 그래서 그가 그린 여성들은 어둡습니다.
뭉크는 우울하고 부정적인 감정 잘 다져서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점점 증세가 나아졌다고 합니다. 그는 작품활동을 꾸준히했습니다. 그러나 깊은 절망 속에서 그린 그림만큼 인정받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뭉크는 죽음의 공포와 불안 속에서도 그림을 놓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의 상처에도 작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포기하지도 않았고요. 뭉크는 죽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갔습니다. 뭉크의 절망은 포기하지 않은 자가 찍은 발자국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희망적입니다. 뭉크의 희망이 당신의 상처에도 스르륵 스며들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