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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샤인 Aug 16. 2022

아기와 몇 개월간 이별하다

홀로 남겨지다

루하 D+575


아내와 루하가 오늘 한국으로 떠났다. 최소 5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마음의 준비를 계속했었지만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루하는 아빠 우는 거 처음 봤을 거다.


이곳 클리브랜드에는 한국 직항이 없다. 루하의 첫 비행을 아내 혼자 아기와 짐을 붙들고 환승까지 하기는 무리라 생각이 들어 비행 전날 직항이 있는 시카고로 운전해 가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비행기로 떠나기로 했다. 가장 가까운 직항은 3시간 거리 디트로이트이지만 델타항공이라(델타항공이 불편하다는 평들이 있어) 가장 가까운 대한항공 직항이 있는 시카고로 간 것이다. 6시간 거리였지만 국적기로 한 번에 갈 수 있다면야 감내할 만한 거리였다. 감사하게도 루하가 생각보다 많이 칭얼되지 않아 의외로 순탄했던 시카고로의 이동이었다. 6시간 거리를 몇 번의 쉬는 타임을 포함해 8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엄청나게 선방한 셈이다.


무료 숙박권 덕분에 공항 근처 스위트룸에서 머물 수 있었다. 낯선 환경이지만 집에는 없는 소파도 있고 티비도 있고 누르면 소리 나는 금고도 있기에 루하는 신나서 하이퍼엑티브 모드로 호텔방을 날아다녔다. 매일 보던 아기이지만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루하의 모든 행동을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한국에서 영상 통화로 매일 보겠지만 직접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니까.


루하를 재우기 전에 한참 동안을 품에 안고 호텔방을 서성거렸다. 작년에 비해 많이 컸지만 아직도 18개월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기인 루하, 매일 퇴근하고 돌아오면 그새 조금씩 자라 있는 이 아기를 몇 개월 동안 품에 안아보지 못한다니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해서 그냥 꼭 안고 있었다. 슬픔을 애써 누르며 루하에게 아빠의 기분을 이야기해 주었다.


"루하야, 오늘 밤이 지나면 아빠랑은 당분간 못 보게 될 거야. 아빠는 그래서 너무 슬퍼."


.. 까지만 하고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눈물이 벌써 주룩주룩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 슬펐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었다. 사랑스런 루하를 매일 직접 볼 수도 없고 안아볼 수 없고, 출근 전과 퇴근 후 짧은 시간이지만 루하가 좋아하는 인형극 놀이를 해줄 수 없고, 그 인형극을 보며 자지러지는 루하의 웃음을 볼 수도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나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슬픔이라고 해야 하나. 원래 감정 기복이 많이 없었고, 미국에 온 뒤로 우울증 때문인지 감정이 완전히 메말랐다고 느꼈었는데 이런 슬픔이 밀려오는 것이 놀라웠다.


몇 년도 아니고 몇 개월인데 뭐 그리 오버하냐고 할 수도 있다. 아마 나도 루하를 낳아보지 않았으면 비슷한 말을 했을 거다. 하지만 18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루하랑 정이 많이 들었고, 루하만이 줄 수 있는 기쁨과 감격, 그리고 사랑이 있었다. 존재 자체가 사랑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영원한 이별도 아니고 몇 달간의 이별인데 왜 이리 슬플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루하의 존재는 나의 내면과 맞닿아 있었음을 깨닫는다. 사실 난 이곳 미국에 온 뒤로 계속 버티고 있었다. 다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했었다. 내가 이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루하와 아내 때문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보듬는 전우 같은 존재가 아내라면 루하는 아내와는 다른 또 다른 차원의 버팀목이었다. 미국에서의 삶에 있어 거의 유일한 기쁨이자 보람이었으니까.


그래서, 나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슬픔을 느꼈나 보다. 이곳에서의 유일한 삶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니까.


시카고에서 홀로 운전하며 돌아오는 와중 뒷좌석의 빈 카시트를 볼 때마다 울컥울컥 해서 힘들었는데 집 문을 열고 들어오자 루하의 유모차가 있던 공간이 텅 빈 것을 보고 결국 또 휴지를 몇 장 뜯었다.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루하의 장난감과 놀이기구들. 루하가 떠나면 이 모든 사물들이 슬픔으로 물들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절절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환기하러 베란다 문을 여는데 눈앞에 선명한 무지개가 딱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마치 나를 위로해 주는 것처럼. 신앙적인 이야기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절묘한 타이밍들에 무지개들을 보여 주신다. 그래, 홀로 남겨진 이 시기도 곧 적응하겠지.


오늘 밤을 포함한 며칠 밤이 고비겠지만 시간은 흘러 흘러 다시 루하와 아내와 재회할 날이 올 것이다.



호텔방에서 집에는 없는 티비로 뽀로로 보는 루하
루하의 유모차가 있던 곳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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