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정들어가는 시간
루하 D+497
어느덧 16개월 아기가 된 루하의 별명은 '리틀 휴먼'이다. 쪼끄만 아기가 자기도 사람이라고 이것저것 다 하려고 하는 것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붙여준 별명이다. 침대에도 오르고 싶고, 리클라이너에도 오르고 싶지만 아직은 한참 높은 현실을 직시하고 슬픈 눈으로 아빠를 응시한다던가, 바퀴 달린 모든 것과 사랑에 빠져 일단은 굴려봐야 하는데 밀어도 굴러가지 않으면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던가, 엄마 아빠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닫으면 수차례 두드리다가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문 앞에 앉아 점거 시위를 시작한다던지 말이다.
그뿐인가, 엄마가 믹서기에 바나나와 우유를 갈면 집안 어디에 있던지 그 소리를 귀신같이 듣고 달려와 부엌에 착석해 어서 달라고 입맛 다시며 보채고, 잘개 잘라준 수박을 다 먹으면 빈 그릇을 한 번 보고 절규하고 엄마 아빠를 한 번 보며 절규하는 자신의 의사표현도 확실한 리틀 휴먼, 작은 사람이다. 나중에 본격적으로 말까지 하면 얼마나 귀여울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자각과 동시에 타인에 대한 자각 또한 늘어간다. 낯을 점점 더 많이 가리게 되어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얼음이 된다. 하지만 낯을 가린다는 의미는 반대로 익숙한 사람과의 애착이 더 깊어진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애착의 1차 대상은 엄마 아빠다. 엄마는 뱃속에서부터 10개월간 친해지는 시간이 있었고, 전업맘일 경우 아기와 보내는 시간이 아빠보다 월등히 많기 때문에 애착이 가장 강하게 형성되는 대상인 것 같다. 하지만 아빠에게도 기회는 주어진다. 아기도 지각이 있기 때문에 엄마 외에도 집 안에 일정 시간 동안 함께 있는 '그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것을 점점 깨닫는다. 게다가 자기 얼굴과 닮았다는 사실은 동질감(?)까지 선사한다.
아기 아들에게 아빠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마 몸으로 놀아주는 것일 테다. 공중으로 높이 던져지는 경험이라던지 아니면 어깨 무등같이 힘으로 커버해야 하는 활동들은 아빠의 전유물이다. 딸을 낳아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아들에게는 아빠=즐거움 공식을 각인시켜주는 활동인 것 같다.
루하같은 경우는 아빠와 좋아하는 놀이가 몇 가지 더 있다. 그중 하나는 침대 위에서의 '어디가노' 놀이다. 침대 한쪽 끝에는 가습기가 있고, 반대쪽 끝에는 베이지색 램프가 있다. 둘 다 루하의 최애템이다. 침대에 올라가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루하의 신호가 있으면 아빠는 루하를 침대 위로 내동댕이친다. 그렇다, 올리는 것이 아니라 내동댕이친다. 배로 착지하도록 슈퍼맨 자세로 던져 올린다던가, 발을 잡고 270도 회전을 걸어 등으로 착지하게 하는 것이 포인트다. 그럼 벌써 잇몸 만개다. 내동댕이쳐진 몸을 추슬러 힘들게 침대 위에 선 루하는 백퍼 가습기로 돌진한다. 그럼 아빠가 가만히 있지 않지. 어디가노~~~ 대사를 치며 달려가는 아기에게 럭비 태클을 선사하면 루하는 꺄르륵 소리를 내며 뒹군다. 이보다 세상 행복한 웃음은 없다.
우여곡절 끝에 가습기에 도달해 가습기가 내뿜는 수증기 맛을 몇 번 보면 이제 뒤돌아 램프를 찍어야 한다. 하지만 루하가 서서 몇 걸음 내딛는 것을 아빠는 참지않긔. 무자비한 태클에 루하는 그대로 고꾸라지며 숨이 넘어갈 듯 웃는다. 침대 위에서의 격렬한 몸놀림인지라 나도 힘이 들지만 루하의 웃음은 그 어떤 에너지 드링크보다 힘이 난다. 램프에 도달해 전구 관찰이 끝나면 의미 없는 고지전이 펼쳐지고 체력이 떨어진 루하는 침대 밑으로 내려진다.
그리고 요즘 들어 부쩍 빈도가 늘어난 놀이가 하나 있다. 사실 놀이가 아니라 댄스타임이다. 주로 바나나우유를 먹고 난 직후 기분이 좋을 때 일어나는데, 아빠를 앞에 두고 루하가 막춤을 추기 시작한다. 아빠가 환호와 화려한 몸놀림으로 호응을 해주면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려 춤신춤왕 모드로 전환된다. 아기의 스탭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빠른 발놀림과 그에 상응하는 팔놀림을 보며 처음에는 깜짝 놀랐었다. 말로 표현해 보자면 브라질 삼바 댄스와 아프리카 우가 댄스의 혼합? 아무튼 흥이 있는 아기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아빠쪽 피가 확실하다.
이렇게 함께 놀며 춤추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아기와 더 정들어간다는 것을 느낀다. 이런 세세한 기억들은 루하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겠지만 아빠와 보냈던 그 느낌들은 애착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겠지.
같이 춤출 때는 마냥 행복하고 웃겼지만 곤히 잠든 아기를 보며 좀 전의 해피타임을 복기해보면 뭉클할 때가 많다. 아빠라는 존재에게 아기가 주는 전적인 신뢰와 사랑이 느껴져서, 그리고 그것이 아빠를 아빠 되게 하는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