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큐티 묵상 막 11:1-10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님을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며 맞이하던 무리들. 새드앤딩을 아는 소설을 읽는 것처럼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왜냐하면 이들은 일주일 뒤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이기 때문이다.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난 이, 눈먼 자가 눈을 뜨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귀신들이 떠나가는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가 바로 이 자라는 확신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구원자를 열렬히 환영한다. 하지만 정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 알고 있었을까. 엄청난 능력을 가진 메시아가 곧 우리를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줄 거라는 소문에 다들 들떠있었고 정치인 유세를 보듯이 예수님을 환영하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그들과는 기대와는 정반대로 예수님은 너무나도 나약하게 종교지도자들에게 내동댕이처졌고 대중의 심리를 잘 아는 대제사장들의 선동에 휩쓸려 무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형을 열열히 지지한다. 이 사람이 무슨 죄가 있냐고 반문하는 빌라도에게 오히려 바라바를 놓아달라는 어처구니없이 열정적인 이 무리들.
‘안다’라는 말의 뜻을 요즘에 많이 생각하던 중에 이 본문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정말 내가 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 내가 진짜로 아는 것은 내가 삶으로 직접 체험하거나 그것을 붙들고 일정 시간 동안 씨름하여 얻어내야 하는 것임을 새삼스레 다시 깨닫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일주일 전에는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환영하다 그다음 주에는 예수님을 죽여버리는 엄청난 태세전환의 무리들을 본다. 물론 환영했던 무리와 십자가형을 요구했던 무리들이 다 같은 무리들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별개의 집단이라는 언급이 딱히 없기 때문에 같은, 혹은 많이 겹치는 무리들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태세전환인가? 내 생각엔 그들이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이다. '안다'라고 생각했지만 안다고 생각했을 뿐 알지는 못했다. 소문으로, 어쩌면 직접 기적을 목격하면서 이 사람의 능력치에 감탄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듣고 보았을 뿐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 그랬기에 다른 사람들이 대단한 분이라고 하면 열렬히 환영하지만 반대로 신성모독을 일삼는 파렴치한 죄인이라고 그러면 그런가 보다 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어쩌면 메시아라고 생각했는데 자신들이 원했던 메시아상이 아니라서 배신감에 더 그랬을 수도 있겠다. 무리는 무리일 뿐 제자가 아니었기에.
이해는 한다. 매일의 바쁘고 치열한 삶 속에 어떠한 것을 제대로 알기 위한 노력은 너무나 많은 에너지가 들어간다는 것을.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서 어떤 판단을 할 때에는 내가 직접 알아보고 완전히 이해를 하고 판단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속지 않고 사실확인과 교차검증을 해보며, 필요하면 직접 경험해 봐야겠다.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않도록 노력해겠다.
진짜뉴스와 가짜뉴스, 현실세계와 가상세계,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 신념과 사실의 경계가 점점 더 모호해지는 시대 가운데서 무언가를 확실히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깨닫는다. 그리고 그 앎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며 그 하나님은 말씀에서 알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