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선 Jul 15. 2024

엄마 빤스

난임 2년 차 연말의 일이다. 이제 십여 일이 지나면 또 한 살 먹는구나 생각하니 초조함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제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려고 거울을 보면 칼로 쭉쭉 그은것철럼 베개 자국이 얼굴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아 이제는 나이를 먹으니 피부 탄력성도 잃어가는구나.'


나는 비비크림이라도 찍어 발라야 하나 고민을 했다. 더욱이 출근 후 점심때까지 이 베개 자국은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그런데 이 베개 자국은 어느 날은 오른빰, 다른 날은 왼빰, 이마, 턱 등 부위도 옮겨가며 무작위로 나타났다.

'수분이 부족한 것인가'라는 생각에 하루 물을 1리터씩 마셔봤지만 다 소용없었다.

노화가 심각하다고 느끼고 또 한차례 시험관 실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무룩한 와이프에게 조심스럽게 고민을 말했다.


"심각한 노화 현상이 생겼어"


이 말을 들은 와이프는 "아 깜빡했다" 이러면서 수산 시장 바닥에 떨어진 활어처럼 팔딱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 베갯속에서 무엇인가를 주섬주섬 꺼내왔다. 신생아 배냇저고리라고 했다.

난임 카페에서 귀하게 태어난 아기의 배냇저고리를 남편 베갯속에 넣어두면 바로 임신한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내 베갯잇에 넣어두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주 어렵게 구한 것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이번 시험관 차수 끝나면 꺼내려고 했는데 깜빡 잊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두 가지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배냇저고리를 베고 잤는데도 이번 시험관을 실패해서 울어야 하는 것인지, 피부 늘어짐 노화가 아님으로 웃어야 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그 일이 있고 2년이 지나고 또 연말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계속 시험관 시술에 실패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으면서 느끼지만 연말이 되면 마흠 한켠이 참 으스스하다. 그 해에 아무런 좋은 일이 없으면 더욱 그렇다 나는 이 얼마 남지 않은 한 해를 그냥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난임 해결책을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어느 유튜브에서 봤던 난임 전문 무당이 알려준 것 중 하나를 실행하기로 했다.


'시어머니의 오래된 속옷을 침대 커버 안에 놓고 며느리가 그것을 깔고 자면은 임신한다.'라는 내용이다. 지금 생각하니 다소 섬뜩한데 당시에는 이판 사판이었다.

나는 바로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했다.


"엄마 저녁 드셨어요?"


"그래 퇴근 중이냐?"


"응 할 얘기가 있어서."


"뭔데 그리 심각하냐?"


"엄마 입었던 빤스 하나만 줘요"


"뭐라고? 뭘 달라고?"


"아이 엄마 빤스 좀 달라고"


"여보세요? 이거 보이스 피싱 아녀? 이만 전화 끊어요"


"아니야. 엄마. 무슨 보이스 피싱이 돈을 달라고 하지 빤스를 달라고 해요?"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 집 주차장으로 왔다고 와이프 몰래 나오라고 전화를 하셨다.

어머니 손에는 종이 쇼핑백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건네주면서 말씀하셨다.


"20년 된 빤스야"


어머니가 가신 후 나는 길거리에 서서 쇼핑백 열어봤다. 그 안에는 또 꽁꽁 싸맨 검은 비닐봉지가 있었다. 포장을 이중으로 하셨다. 그리고 그 봉달이를 열어보니 그 안에서는 오래된 것 치고는 깔끔한 분홍색 팬티가 나왔다.

기분이 이상했다. 표현은 단 한 번도 안 하셨지만 얼마나 손주를 기다렸으면 이를 마다하지 않으셨을까 생각하니 울컥함이 몰려왔다.

그런데 순간 오버랩되는 게, 시골 어머니가 갓 담근 김치를 보자기에 꽁꽁 싸매고 상경해서 아들에게 건네주는 영화 속 한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비록 우리 엄마가 나에게 건네준 것은 빨간 김치가 아니라 분홍 팬티지만.

나는 그렇게 한동안 미소를 지으면서 놀이터에 서 있었다.

나는 바로 그날 와이프 몰래 침대 커버 속에 속옷을 숨겨 두었다. 딱 한 달 후 올해 마지막 시험관 차수까지 이제 버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에 있는데 와이프에게 전화가 왔다. 와이프는 전화를 받자마자 소리쳤다.


'침대 커버 세탁소에 맡기려다가 발견했다고 안방에 웬 여자 속옷이냐고? 바람피운 거냐고?'


독수리처럼 쏘아붙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잠시 망설이다가 자초지종을 다 설명했다. 그랬더니 와이프는 한 겨울 얼음장 깨지는 목소리로 더욱 소리를 쳤다.


"아니 내가 왜 어머니 속옷을 깔고 자야 했냐고?

이 무슨 해괴한 일을 벌이냐고?

그런 미신을 믿는 거냐고?"


잠시 생각하는데 나도 화가 났다. 나는 다시 말했다.


"2년 전에 너도 배넷저고리를 내 베갯속에 넣지 않았느냐?"


와이프가 잠지 주춤거리길래 나는 더욱 힘을 내서 쏘아댔다.


"오히려 내가 더 기분 나빠야 한다.

그나마 너는 아는 사람속옷을 깔고 겨우 며칠을 잔 것이다.

하지만 2년 전 나는 생판 모르는 사람 속옷을 한 달 동안 잤단 말이다.

화내야 하는 사람은 나란 말이다"


그렇게 시험관 차수 들어가기도 전에 들켜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정말 미신이라 그랬던 것일까

그 해당 차수 시험관은 결국 실패했다.


종가집 김치 같이 귀한 그때의 우리 어머니 빤스는 지금도 내 책상 서랍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빛바랜 20년된 분홍색 엄마 빤스'

이전 13화 나의 안식처 순대국밥 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